[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1978년 봄. 서울 남산을 기댄 기와지붕 너머로 통기타 선율이 피어올랐다. 노래는 ‘노고지리’가 부른 '찻잔'. 연주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연방 기타 줄을 튕기는 고사리 손. 목소리는 앳됐지만 풋내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가락은 무르익었다. 바로 14살 소년 김태원이었다. 지금은 마흔 다섯 꽃중년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앳된 소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흠도 없이 무난히 완주에 성공했다.
"또래 친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곡이었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환경은 열악했다. 악보가 없어 LP(레코드플레이어) 재생을 반복하며 음을 외웠다. 물음표가 생겨도 혼자 고민하고 해결했다. 큰 형이 기타를 다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보물 1호를 건드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해가 지면 기타는 손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기타를 기다리는 달빛 아래 반나절은 길기만 했다.
바로 록그룹 부활을 이끌고 있는 김태원의 음악데뷔기이다. 그는 그랬다. 무수한 역경과 고난을 딛고 오늘날 최고의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김태원과 그의 멤버들이 만들어가는 록음악은 바로 한국 가요계 록의 역사와 일치한다. 그들의 꿈과 희망을 '스타일기'란 코너로 연재해 간다. 팬들의 관심을 기대해본다.
그의 기타 연주는 이렇듯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우울했던 삶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김태원의 집은 가난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발명가인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었다. 더덕더덕 벽에 붙은 빨간 딱지는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김태원이 다닌 초등학교는 교복을 입었다. 부족한 형편에 어머니는 너덜너덜해진 졸업생의 옷을 구해 아들에게 건넸다. 어렵게 책상 앞에 앉았지만 고개는 항상 무거웠다. 가방 안이 텅 비었다. 따뜻한 도시락도,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런 그를 놀려댔다.
“왕따였다. 초라한 성적에 선생님마저 문제아로 치부했다.”
부잣집 아이들에 대한 질투와 동경은 콤플렉스가 됐다. 사춘기를 맞으며 상처는 방황으로 이어졌다. 학교와 점점 멀어졌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출석일수는 각각 18번과 4번. 어머니의 노력 덕에 겨우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못난 아들 탓에 몇 번이나 선생님을 찾아가 간청하셨다. 불효자였다. 그 때만 생각하면 후회된다.”
교과서 대신 집어 든 건 당구 큐와 기타였다. 실력은 모두 뛰어났다. 당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미 300점을 넘었다. 기타 연주는 더 출중했다. 중학교 교복을 벗기도 전에 레드 제플린의 'Babe I'm gonna leave you'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서서히 서대문 인근 학생들에게 그가 인지되기 시작했다. 그 일대에서 ‘최고의 기타리스트’ 김태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허전하기만 했던 그의 주변에는 어느덧 삼삼오오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김태원은 방학 때마다 이들과 바다여행을 떠났다. 부산, 대천, 인천, 강릉…. 발자국이 묻은 모래사장에선 늘 음악소리가 흘렀다. 소외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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