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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어느 일장기의 수모

시계아이콘02분 12초 소요

한·일 양국 간에 문화적 이질감을 좁혀보자는 의도로 매년 학생대표들을 정기 교류시키는 프로그램이 출범할 때였습니다. 명칭은 ‘아시아청년회의’로 하고 제1회 대회를 일본에서 열기로 합의됐지요. 한국 측 대학원생 100여 명이 지도교수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난 날이 1985년 8월13일이었습니다.


개막식이 열린 대강당에는 두 나라 학생대표들, 일본 문부성 고위관리들과 주일 한국대사까지 참석해 열기가 제법 그럴 듯 했습니다. 격년제로 주최국이 비용을 부담하는 행사라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강당의 정면에 세로로 내걸린 양국의 대형국기가 서로 짝이 맞지 않은 것 같아보였습니다.

애국가가 나올 때, 멀리 보이는 일장기의 피부가 매끈한 반면 태극기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인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태극기를 다리미로 좀 다려서 걸 수는 없었을까...” 혼자 생각하다가 자세히보니 유독 태극기만 중앙에 세로로 길게 재봉선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두 국기가 세로 폭은 같았으나 가로 폭은 분명히 태극기가 작아보였습니다.


한국학생들 표정을 둘러보니 낌새를 못 차렸던지 아니면 의식이 없는 건지 엄숙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축사가 줄줄이 이어졌지만 내내 못마땅해 태극기만 눈에 박혔지요. 행사가 끝나고 분과별로 주제발표가 예정된 각 회의실로 모두들 빠져나간 후 책상을 딛고 올라서서 태극기의 가로 폭이 일장기보다 줄어든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어이없게도 그 대형태극기는 멀쩡했던 기폭을 중간으로 자른 다음 다시 겹쳐서 재봉을 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따라서 가로기폭이 양쪽 5cm정도씩 겹쳐 들어가 결과적으로 일장기보다 약 10cm 가량 기폭이 줄어든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당연히 태극마크의 원형이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죠.


당시에도 일본교과서 역사왜곡문제가 한·일간의 쟁점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또 하나의 ‘태극기 왜곡문제’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판단해 정치분과위원회에서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물론 만류하는 학생들도 있었지요. 준비한 발표도 못하고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다고 말입니다.


회의를 준비한 일본 측 사무총장을 불러 태극기의 비정상적인 몰골을 설명하고 일장기에 비해 가로기폭이 줄어든 사유를 공식적으로 해명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아울러 문제가 시정이 될 때까지 학생대표 자격으로 전체 회의일정을 보이코트하겠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당황한 주최 측은 문제의 태극기를 확인하고 돌아와서 자신도 미처 몰랐다며 일주일 뒤 폐막 시까지는 시정하겠으니 우선 일정을 진행시켜달라고 사정 했습니다. 하지만 그 변명이 맘에 들지 않아 준엄하게 추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민간행사지만 엄연히 양국 간에 공식행사임은 틀림없다. 당연히 같은 사이즈로 걸렸어야 할 태극기로 잘못된 사실을 행사 전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일장기에 비해 줄어든 가로기폭에다 다림질도 않고 구겨진 채 걸도록 방치한 것은 다분히 한국 측을 모욕하려는 고의성이 있다고 본다”고 따졌습니다.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더니 워낙 사이즈가 커서 일장기와 같은 크기의 새 태극기를 이른 시일 내 마련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나중에 수소문 해본 바에 의하면 태극기제작을 우에노 공원 근처의 한 가게에 발주한 게 실수였다고 했습니다. 그 지역이 원래 조총련계열 상가들이 많고 반한정서가 강해서 태극기를 훼손해 납품한 것으로 추정됐지요.


아무튼 이틀 만에 교체하기는 어렵다며 다음부터 절대로 그런 실수는 않을 테니 제발 일정이나 진행하도록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항의하면 사과하는 척하고 잠잠해지면 다시 한국인의 정서를 건드려보는 전형적인 일본인들의 수작 같아 보여서 그 기회에 한번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좋다, 대안을 제시해 주겠다. 새 태극기를 구할 수 없다고 하니 굳이 그걸 고집하진 않겠다. 대신 8월15일 오전까지 훼손된 우리 태극기와 같은 모양으로 일장기를 세로로 반 잘라서 재봉해 내건다면 회의일정을 진행하겠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틀 후 그들은 일장기를 세로로 이등분해 가장자리를 접고 재봉한 다음 태극기와 똑같은 사이즈로 만들어 걸었습니다. 그 결과 일장기 중앙의 붉은 해는 타원형으로 일그러져 있었지요. 전날 밤 일본인들이 자기들 스스로 긴 가위를 들고 일장기를 반으로 자르는 수모를 당하며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걸 본 순간 일제하에서 태극기 하나만 들고 만세를 부르짖다 끌려갔던 힘없는 한민족들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해방된 그날 저마다 숨겨 둔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을까요? 매년 하루 한글날에 한글을 생각하듯이 이번 주말 광복절에 태극기의 소중한 의미를 잠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24년 전 광복절 40주년인 1985년 8월15일에 도쿄 한복판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어느 일장기의 수모’였습니다.

시사평론가 김대우 pdik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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