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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골편지]불온한 관계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중략...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나오는가 ?
사람들이여,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여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른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리라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恐怖)를 보여주리라
...후략...
 
- (엘리어트의 '황무지' 제 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꽃이 핀다고 새들이 노래한다.
꽃이 진다고 새들이 노래한다.
 
꽃나무 아래 서면 어떤 노래가 들리는가 ?
내게는 조관우의 '꽃밭에서'가 귓가에 맴돈다.
"이렇게 좋은 날에 내 님이 오신 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의도 벚꽃이 지려고 한다. 이제 곤지암 일대의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곤지암은 벚꽃 피는데 여의도보다 일주일 가량 늦다. 그 다음 잣나무골 왕벚나무 꽃이 핀다. 내게는 왕벚나무 다섯그루가 있다. 모두 원적산에서 옮겨왔다. 입구, 안방 창문 앞 그리고 마당 언저리에 심겨져 있다. 왕벚나무는 토종이다. 왕벚나무는 일본산과 달리 잎이 나서야 꽃을 피운다.
 
대개 벚꽃은 일주일 가량 피지만 왕벚나무는 열흘 가량 핀다. 그래서 여의도에서 곤지암과 잣나무골로 이어지는 나의 벚꽃 피는 4월은 다른 이들보다 좀 긴 편이다. 스무날 이상 벚꽃을 감상할 수 있어서다. 왕벚나무 꽃이 흐드러지기 시작하면 겨우내 집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들고양이들이 잣나무숲으로 들어간다. 들고양이와 함께 눈앞에서 사라지는게 또 있다. 쥐들이다.
 
고양이와 쥐들은 이제 숲에서 새로운 동거를 시작할 것이다. 서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영유하는 고양이와 쥐는 사실 적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과학이 다 맞을 수는 없다. 먹고 먹히는 관계란 먹어주고, 먹혀주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사랑이라는게 낙지들에게는 수많은 발과 빨판으로 서로의 몸과 목을 조르는 행위일 수 있는 것처럼 쥐와 고양이도 사랑을 그렇게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늘 같은 공간을 향유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들이 왜 꽃 피는 시절이 돼서야 숲으로 가는지...이삿철이 본래 봄날이라서 그런 건지 아닌건지. 쥐들이 왜 고양이에게 기꺼이 먹이가 돼 주는지 그들의 관계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여간 꽃 피는 시절, 그들이 사라진다. 간혹 한낮에 왕벚나무 아래 졸고 있는 고양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꽃잎을 덮어쓰고 나른하게 잠든 모습이란.
 
그리고 뱁새들이 숲에서 마당으로 내려온다. 뱁새들은 마당의 나무들에도 집을 짓는다. 벚꽃이 지기 시작하면 뱁새들은 짝을 만들고 제비들이 돌아오는 5월 중순이 돼서야 알을 낳는다. 4월 한달은 아주 분주하다 못해 정신 없을 지경이다.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뛰고, 나무들은 열나서 꽃과 잎을 피우고.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날 뛰는 것과 나무가 새들의 둥지가 돼주는 것은 그들의 관계다. 쥐와 고양이의 관계가 그렇듯, 새와 나무의 관계가 새로 시작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떠날 것은 떠나고, 올 것은 온다. 시간의 또다른 속성이다.
 
(나는 이제부터 새들에 대한 경계태세에 돌입한다. 4월 지나고부터는 새들이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일들이 늘어난다. 요즘 창은 선탠이 돼 있거나 이중창여서 밖에서 보면 주변 풍경이 그대로 다 비친다. 하늘도 비친다. 그래서 새들이 날다가 창문에 부딪쳐 죽는 사고가 허다하게 발생한다.)
 
나는 생전 처음 진저리나는 벚꽃바다를 만난 것은 84년 4월 진해에서였다. 거리며 훈련소가 온통 꽃천지였다. 군항제 마지막날의 진해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그 때 벚꽃 흐드러진 훈련소 정문에서 한 여자와 헤어졌다.그리고 몇날을 꽃잎이 눈보라처럼 날리는 광경에 넋을 잃었었다.
그 시절 식당을 나올 때마다 자갈 몇개를 주었다가 갈매기 떼들에게 던지곤 했다. 갈매기들을 맞히려는 것은 아니었다. 훈련소 식당 하수구를 따라 벚꽃 나무 아래 밥풀을 쪼고 있는 갈매기들이 미웠다.

"너른 바다에서 밥을 먹으라. 돌아가라. 시궁창이나 뒤지다니. 비겁하다. 너희는 새도 아니야. 차라리 내 돌에 맞아 죽든지, 바다로 가든지..제발 !!"

나는 그렇게 갈매기들에게 절규했다. 비가 내리면 연병장이 꽃물진 바다로 변했다. 연분홍 꽃물이 넘치던 날 새벽녘 나는 머리맡까지 다가왔던 첫사랑을 보았다. 내가 어떤 환상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조관우의 노래가 사랑을 잃은 이와 꽃밭과 옛 애인의 관계인 것처럼 나와 갈매기, 벚꽃은 어느 한 순간의 관계였다. 꽃과 쥐와 고양이와 토종새들처럼 나는 지금 숲속의 집과 가족과 새들과 나무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시간이다.
 
새로운 관계를 짜야 하는 4월이 무르 익었다.
이제 텃밭에 씨를 뿌려야겠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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