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천주교회 최초의 추기경이자 천주교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이 이날 오후 6시 12분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했다"고 밝혔다.
◇선종 2~3일 전부터 "사랑하며 살라", 장기기증 몸소실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추모메시지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빛과 희망이 되어주셨다"며 "평소 추기경님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고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 겸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정진석 추기경, 의료진, 김 추기경님 비서인 백성호 신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며 "추기경님께서 '고통스럽지 않냐'는 주위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기위해 노력하셨다"고 전했다.
또 "추기경님께서 2-3일전부터 '나는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시며 문병 온 신부님 수녀님들께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전했다.
평소 생명나눔을 강조했던 김 추기경은 지난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바 있어, 선종 후 각막기증이 이뤄졌다.
◇추기경이 걸어온길...한국의 독립·민주화·노동운동에 헌신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며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김보현은 천주교를 믿다가 무진박해 때 충청도 연산에서 잡혀 순교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했고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로 편입해 학업을 계속했다.
1941년 4월 김 추기경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했으나 독립투쟁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1944년 일본 학병으로 강제 징집당해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상지대학에 복학해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성신대학교(현 카톨릭대)에 편입해 학업을 지속하다가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됐다.
김수환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상북도 안동성당(현 목성동 주교좌성당)이었다. 이어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경상북도 김천성당 주임, 성의 중·고등학교 교장 등을 거쳤다.
그런 다음 1956년 7월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해 그 해 6월에 카톨릭 시보사(현 가톨릭 신문)사장에 취임했다. 김 신부는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통해 가톨릭 언론 발전에 기여했다.
1968년 김수환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 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상태가 엉망이었으나 김수환 대주교는 혼란을 혁파하고 안정된 행정을 보여줬다.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고 당시 추기경 중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 의장을 역임했다.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1998년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사임할 때 까지 한국의 종교 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한다고 했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쓰여졌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되지만 사람들이 천주교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는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후 시국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봉사했다.
1987년에는 천주교 서울대 교구에 빈민사목위원회를 두었고 재임기간 중에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보여줬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서리를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에게 물려준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통해 사회 곳곳에 그의 영향이 끼쳤으며, 세계적으로도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재임 추기경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어록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가 눈이 멀고 길을 잃을 때마다 손을 잡아 이끌어준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남긴 어록을 통해 그의 숨결을 느껴본다.
▲사형제도에 관해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입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하는데 왜 나라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낙태제도에 대해
현대인에게 자신의 생명을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물어보면 어머니 태중에 임신된 순간부터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다면 남의 생명도 그렇게 인정을 해야합니다.
▲황우석 박사 논문조작 사건에 대해
세계 앞에 한국이 고개를 들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너무 좋은 머리를 주셨어요.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 그렇게 했으니...
▲온라인 상의 악성댓글에 대해
컴퓨터와 인터넷이 편리한 도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그것이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인터넷에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음란물이 떠다니는데도 우리나라가 IT강국이라고 자랑하는 게 마냥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추기경이 가시는 길
김 추기경의 빈소는 명동대성당에 마련됐다. 장례는 5일장으로 결정됐으며 장례 닷세째인 20일 오전 10시께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과 서울대교구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장례미사가 거행된다.
발인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묘지이며 22일 명동성당에서 추도미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장례기간 중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서의 일반인 공개 조문은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가능하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