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은 선종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다. 그는 순교자 집안의 막내아들로서, 철 없는 사제요, 소외된 이들의 벗이었다.
그는 자신이 신부의 길을 걷게 된 것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샘이 깊은 물」1984)
그는 그의 어머니의 말에 따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에 입학했다.
졸업후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르고 유학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그는 사제 후 곧바로 안동성당(지금의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1953년 4월 대구대교구장 비서, 1955년 6월 김천성당(지금의 대구대교구 황금동성당)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귀국 후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취임했고 이후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기에 이른다. 1966년 3월, 그의 나이 44세였다.
이후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 명동대성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교구장 착좌식에서 김수환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는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한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힘만으로는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착좌할 수 있는 것은 저를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인도를 믿는 신앙심과 신자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후 그는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많은 이들 가운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만났고,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했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위한 싸움에서 미움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 1986. 3. 9)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김 추기경은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 인자한 '혜화동 할아버지'로 넉넉한 웃음을 지닌 채 세상을 향한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는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의 마지막회 '인생을 돌아보며' 마지막 부분을 통해 이 같은 말을 남겼다.
"생각해보면 나는 죄인이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고개도 들 수 없는 대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리고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하느님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나의 모든 걸 바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께 영광 있으소서. 아멘"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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