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낙규군사전문기자
인도네시아가 카타르가 사용하던 중고 미라주 2000-5 전투기 구매를 연기했다. 한국형 전투기 KF-21의 개발 비용을 분담하기로 했던 인도네시아가 공군 전투기 도입 사업을 갈팡질팡하면서 우리나라와도 공동사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다닐 안자르 시만준탁 국방부 장관 대변인은 4일(현지시간) CNN 인도네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재정 여력이 부족해 재무부와 국방부가 미라주 전투기 구입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들여오기로 한 라팔 전투기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현재 보유 중인 수호이와 F-16 전투기를 개조해 공백을 메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6월 인도네시아 국방부는 카타르가 사용하던 중고 미라주 2000-5 전투기 12대를 총 7억9200만 달러(약 1조385억원)에 구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 계약은 현 국방부 장관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 중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프라보워 수비얀토 후보가 앞장서서 추진했던 일이다. 이어 8월에는 미국 보잉과 4.5세대급 전투기 F-15EX 24대 구매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2021년 2월에는 프랑스와 81억달러(약 10조8000억원) 규모의 라팔 전투기 42대를 사들이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내부에서도 굳이 비싼 돈을 내고 오래된 중고 전투기를 사야 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중고 무기 시스템은 도입하지 말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프라보워 장관이 이를 무시했다며 대통령이 문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2014년 우리 정부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각각 개발비의 60%와 20%를 대고 나머지 20%를 인도네시아가 부담하는 기본합의서를 작성했고 2016년 계약을 맺었다. 인도네시아가 시제기 한 대와 각종 기술을 이전받은 뒤 전투기 48대를 자국에서 생산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1조2694억원 상당의 사업 분담금 가운데 2783억원만 납부하고 약 9911억원을 미납 중이다.
이런 가운데 인도네시아가 올해 국방 예산을 대폭 늘린 만큼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론 납득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인도네시아는 무기 현대화를 위해 올해 국방비를 250억 달러(약 32조8000억원)로 20% 이상 증액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KF-21 ‘보라매’ 분담금 납부 계획을 통보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업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대선을 앞두고 인도네시아의 복잡한 정치 지형이 전투기 구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지 언론은 내달 있을 대선을 앞두고 오는 7일 열리는 3번째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 문제가 주요 논쟁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인도네시아 독재자였던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인 프라보워 국방부 장관은 내년 대선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프라보워 장관이 치적을 쌓기 위해 방산 수출 실적이 필요한 한국과 KAI를 압박하면서 계약 조건을 자국에 유리하게 바꾸려는 의도가 있다는 관측이다.
인도네시아가 계속 분담금 지급을 미루면 방사청과 KAI가 다른 국가와 손잡거나 독자 개발 등 ‘플랜B’에 들어갈 것이란 관측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폴란드·아랍에미리트(UAE) 등 KF-21 개발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국가도 여럿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