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기자
"생명보험이라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객 생애 전반을 보살피며 함께 걸어야죠."
생명보험협회장에 취임한 지 3년째, 한결같은 그의 지론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말 취임한 정희수 회장은 이제는 보다 자유롭게 외부를 노닐고 있다. 지난 29일 늘 착용하던 마스크를 벗은 정 회장과 서울 중구 남산 한옥마을을 산책하며 인터뷰를 가졌다.
3선 의원 출신인 만큼 그는 늘 유권자 곁에서 걷는 일이 익숙했다. 여전히 퇴근 후에는 헬스장에서라도 걷기를 멈추질 않는다. 1953년생으로 만 70세이지만 걸음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 만큼 거침없다. 큰 보폭으로 주저함 없이 걷는 걸음 속도는 여느 청년들보다 빨랐다.
정 회장은 "걷기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전신 운동으로 모든 헬스케어의 기본이라 볼 수 있다"라며 "규칙적인 걷기는 노후 우울증, 치매뿐 아니라 뇌혈관·심장질환, 각종 암 발병률을 낮춰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만큼 가능하면 공복에, 주변 분들과 함께 걷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걷는 것이 습관이 됐지만 그는 역시 보험인이다. 걷기를 통해 보험을 이해하고, 걷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이미 생보사들은 걷기를 통해 고객 관리에 나섰다. 보험업계 최초인 AIA생명을 시작으로 한화생명, 삼성생명, 교보생명 등 여러 보험사들이 걷기를 기반으로 한 건강관리(헬스케어)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일정 거리를 걸으면 각종 보상을 주는 식이다. 보험사는 고객이 운동 목표를 달성하면서 기록한 각종 건강수치를 데이터로 분석하면서 더 나은 서비스를 개발한다. 고객 건강 상태가 좋아지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아지고, 지급할 보험금 부담을 줄어든다. 고객과 보험사 모두 이득인 셈이다.
정 회장은 이같은 건강관리 서비스가 최근의 고령화, 만성질환 증가와 디지털 확산 추세와 맞물려 더욱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해외 시장조사기관 GIA에 따르면 전 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 규모는 2020년 1520억달러(약 201조원)에서 2027년 5090억달러(약 674조원)로 연평균 18.8%씩 성장할 것으로 점쳐졌다. 비대면 진료도 늘었다. 첫 실시한 2020년 이용자 수와 진료 건수는 각각 84만명, 142만건이었다. 이후 2021년 319만건·126만명, 2022년 3200만건·1272만명으로 갈수록 급증했다. 정 회장은 "앞으로 정부와 공공기관이 보유한 헬스케어 관련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개방함으로써 일상생활 속 건강위험을 보다 빠르게 인지하고 예방·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정부 차원에서 보다 능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헬스케어 영역에 대한 동력이 부족한데, 보험사들이 나서서 헬스케어 영역에 투자하고 이 분야가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분야에 적용된 이후 통신, 이커머스 등으로 확장하고 있는 본인신용관리업(마이데이터)을 의료, 헬스케어 산업에도 적용하면 업계가 대폭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규제에 가로막힌 상황이다. 의료법 상 개인 의료데이터는 질병이력, 진료·처방기록 등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 의료인 등이 다른 사업자에게 자유롭게 전송할 수 없다. 금융정보처럼 환자 개인이 의료데이터를 제공받아 제3자에게 전송할 수 있는 길을 틔우면 헬스케어 서비스가 보다 정교해지고 맞춤형 제공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한 의료기관과 제약사, 보험사 등이 협력해 신사업도 발굴하려는 협력이 활발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의료계 등에서는 개인정보 유출 등을 우려하며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공부나 건강은 스스로 잘 안 하고 누가 등을 떠밀어줘야 한다"라며 "건강식품은 큰 규제가 없는 것처럼, 몸이 아파 병원에 가기 전 단계에서는 보험사가 국민 건강을 증진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건강수명을 늘린다면 국가 차원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정 회장은 "죽기 전 10년 동안 쓰는 의료비가 전 생애 의료비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라며 "생애주기 후반부에 건강히 지낼 수 있는 '건강수명'을 늘리는 것은 본인과 가정은 물론 국가 건강보험 재정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함께 사회 안전망 강화 차원에서 생보사들이 나서서 사적연금 활성화를 추진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정 회장은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노인빈곤율은 1위라는 불명예가 우리나라에 남아있다"라며 "공적연금 실질소득대체율이 25%가 채 안되고, 퇴직연금 찾아서 자녀들 결혼하거나 집 살 때 다 써버리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공적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3층 연금' 구조를 확립하고 사적연금의 영역에서 소득공제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퇴직연금을 한 번에 받는 비율이 98%에 이를 정도기 때문에 세제혜택 등으로 유인해야 한다"며 "종신으로 수령할 경우 거의 세금을 안 떼는 수준으로 과감한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퇴직연금 실적배당형보험(변액보험)에 최저보증옵션을 부가해 소비자 선택권이 확대되도록 정부와 당국에 건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은 생보업계가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우리나라는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 수준이다. 인구구조가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2025년에는 65세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서며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기존 가입자들의 구매력은 점차 떨어지고, 신규 수요층도 얇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자산 규모가 생명보험사 절반에도 못 미치는 손해보험사들의 실적은 생보사를 앞질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생보사 23곳의 지난해 순이익은 3조7055억원으로 전년 대비 6.0% 감소했다. 반면 손보사 31곳의 순이익은 같은 기간 26.7% 늘어난 5조4746억원으로 집계됐다. 2021년 3800억원 수준이었던 격차가 1조7000억원가량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생보업계의 새 먹거리 찾기가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정 회장은 "선진국은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되는데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암보험, 어린이보험 등 제3보험 영역을 손해보험사에게도 열어주면서 이 지형이 무너진 측면이 있다"며 "이같은 균형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 회장은 특히 요양, 상조까지 생애주기 '마지막 발걸음' 영역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가 차원에서 이것을 다 다루긴 재정적으로도 쉽지 않은 만큼 결국 민간 영역에서도 이를 일정 부분 부담해야 하는데 결국 보험사, 특히 생명보험사의 역할이 커질 필요가 있다"라며 "사망 후 보험금을 지급하면 끝나는 종신보험에서 벗어나 요양, 상조까지 역량을 갖춘 보험사가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까지 여러 장벽이 남아있다. 요양시설 설립이 특히 그렇다.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노인의료복지시설 기준상 30인 이상 요양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업자가 토지와 건물을 소유해야 한다. 일종의 '먹튀'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조건을 충족해 요양 서비스 사업에 진출한 보험사는 현재 KB손해보험이 유일하다. 정작 수요층이 몰려있는 도심권에서는 괜찮을 부지가 찾기도 어렵고 초기비용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이같은 규제를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풀어준다면 생명보험사들이 보다 안정적인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고 봤다. 이미 수요는 확실하다. KB손해보험의 요양사업 전문 자회사 KB골든라이프케어의 요양시설에는 현재 정원 대비 최대 14배 인원이 대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고령화 시대에 요양 시설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수요층을 분석해 건강보험공단 또는 지방자치단체 등 국가 차원의 요양 지원과 보험사 중심의 민간 시설이 역할을 분담해야 이같은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생애 주기 마지막 단계인 상조 영역도 보험사들의 진출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상조서비스는 평소 불입해서 어려울 때 부담을 더는 일종의 금융 영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이 금융사인 보험사들이 더 정밀하고 안정적인 서비스를 펼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상조 서비스 수요도 늘고 있지만 소규모 업체에 따른 소비자피해도 증가하고 있다. 정 회장은 "상조회사들에 대한 불신에 집안 어르신이 위태하실 때 한두 달 정도 불입하고 마는데 이는 상조 본연의 기능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상조 서비스에도 마음 놓고 10년, 20년 불입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들도 믿을 수 있는 요양원, 요양병원과 간병인을 원하는 만큼 마냥 골목상권 보호라며 가둬둘 게 아니라 보험사의 진출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