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정기자
‘헤이세이(平成)’ 직전 일본의 연호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장기 불황을 대변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불황을 설명하는 틀이 있다. ‘프라자 협정으로 엔화가 강해지자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금리를 내렸고, 그 영향으로 자산 버블이 발생했다. 위기를 느낀 중앙은행이 금리를 급하게 올려 1990년에 버블이 터졌다. 일본 정부가 정책적 미스를 잇달아 범해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어리석은 대응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 없는상태가 됐다’가 그것이다.
결과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왜곡된 부분도 많다. 위기 발생 초기 일본 경제는 허술한 상태가 아니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60%대로 선진국 중에서 가장 우수한 편에 속했다. 일본 정부의 정책 능력은 미국이 모델로 삼을 정도로 뛰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외 순자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고 최고의 제조업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이 바보같이 대응했기 때문에 경기 위기가 왔고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맞는 얘기가 아니다.
그럼 왜 일본 경제는 원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걸까? 다른 선진국과 달리 인구 문제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1980년 일본에서는 매년 전체 인구의 1.35%에 해당하는 출생아가 태어났다. 사망자 비율이 0.62%였으니까 둘의 차이인 0.73%씩 인구가 늘어났다.
1995년과 2005년에 인구 구조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5년에 생산가능인구가 정점을 기록했다. 경제 활동이 가능한 15~64세 연령대 인구가 감소하면서 고령화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추세가 강해져 2012년 이후 8년간 해당 인구대가 470만명 줄었다. 그 결과 2020년 일본은 64세 이하 인구가 7450만명, 65세 이상이 362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9%가 고령으로 인해 노동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2005년에 사망자수가 출생자를 능가해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구 감소는 매년 폭이 커져 2010년에 20만명, 2016년에 30만명으로 늘어나더니 2019년에 급기야 50만명대가 됐다. 이 추세가 계속되면 2040~2050년 사이에 지금 1억1000만대인 일본 인구가 1억명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인구가 줄면서 다양한 경제적 문제가 발생했다. 소비 둔화로 성장이 약해진 게 대표적인 예다. 지금 일본의 수출액은 버블 붕괴 때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반면 내수 소비는 당시의 70%에 지나지 않는다. 30년간 일본 경제 침체는 내수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인구 감소로 인한 구매력 약화가 큰 역할을 했다. 인구 감소는 부동산을 비롯해 자산 가격에도 영향을 줬다. 일본 전체 주택의 25%에 해당하는 1000만채가 살 사람을 찾지 못하는 상태고 일본의 금융자산 중 주식의 비중이 5%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인구 감소로 인한 노령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재정도 인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재 일본의 GDP 대비 총부채 비율은 560% 정도다. 이중 금융권 부채는 1990년 이후 150%대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계 부채도 60%대 중반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다. 기업은 아예 150%에서 100%로 부채비율이 줄었다. 부채 증가의 대부분이 정부 때문인데, 1990년 60%대였던 정부부채 비율이 지금은 250%로 높아졌다.
그 동안 일본의 재정 악화를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인프라 투자를 마구잡이로 시행한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2000~2019년까지 일본의 국채 증가 요인을 살펴보면 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난 20년간 일본의 국채 발행액이 725조엔(약 7700조원) 늘었다. 이중 194조엔은 세수 감소를 메우기 위해 사용됐고 315조엔이 사회 보장비용으로 쓰였다. 큰 비중을 차지할 걸로 생각됐던 공공사업 지출용은 59조엔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국채 발행액 중 43%가 고령화에 따른 사회보장용으로 쓰인 것이다. 이 구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한해 조세 수입이 70조엔 정도인데 이중 15조엔 넘는 돈이 사회보장용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본이니까 이런 구조에서도 경제가 견뎌내지 다른 선진국이었으면 큰 난리가 났을 것이다. 2020년 일본의 일반회계 예산 중 이자지불액은 9%에 지나지 않는다. 발행된 국채의 90% 이상을 국내 기관이 보유하고 있어 상환 불능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산도 많아서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부채비율이 60% 밖에 안 된다. 달러만큼은 아니지만 엔화도 국제시장에서 기축통화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어 국채 발행 증가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고 있다.
인구문제는 우리가 일본보다 심각하다. 합계출산율이란 지표가 있다. 한 명의 여성이 가임 기간에 낳을 걸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수를 말한다. 작년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 잠정치는 0.84이다. 일본은 인구가 줄어드는 동안에도 합계출산율이 1.3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 지표가 1.3 밑으로 내려가면 인구의 자연복원이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선을 훨씬 밑돌고 있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2019년 11월에 시작된 인구 감소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도 가까운 시일에 일본처럼 인구 감소로 인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정치가 인구문제로 인한 세대 갈등의 해법을 내놓을 가능성은 없다. 혜택을 보는 사람의 수가 많아 이들의 정치적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 방안은 고령층의 고용을 늘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스스로 벌어서 해결하는 구조를 만드는 건데 일본이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2012년 이후 일본의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었지만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440만명 늘었다.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일자리 증가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 다음이 여성이고, 외국인 노동자도 한 몫을 했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려는 일본정부의 개혁 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는 건데 우리도 참고해 볼만한 사례다. 젊은 사람도 일자리가 부족한데 은퇴한 사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두 그룹이 원하는 일자리의 질이 다르므로 큰 충돌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송화정 기자 pancake@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