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간의 한가위 연휴가 시작됐다. 추석 명절(名節)은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에 맞이하는 전통적 축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명절이 '명절 증후군'을 초래하는 문제의 기간으로 취급받고 있다. 실제 명절증후군의 의미를 찾아보면 '대한민국에서 명절을 보내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각종 여론 조사는 명절에 대한 부정적 통계를 제시한다. 예컨대 최근 20~50대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0.1%가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여행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익스피디아), 10∼50대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70% 이상이 명절 때 가족간 '대화(말)'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밝혔다(엠브레인). 이는 서구에서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을 온 가족이 모여 따스한 사랑을 나누는 축제로 생각하는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왜 우리 사회의 명절이 가족의 사랑을 나누는 축일이 아닌 기피하고 싶은 휴일로 전락했을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허물없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괴롭고 듣기 싫은 말'을 서로에게 너무 쉽게 던지기 때문이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청년들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것은 취업ㆍ입시ㆍ결혼 등 당사자가 직면한 고민거리를 화제 삼는 일이다. 자신의 몸 상태가 걱정스러운 중년 남성은 '과음 하지 말고 건강관리 잘하라'는 식의 조언(?)도 듣기 싫어한다. 실로 취직이 안 돼 가장 괴로운 사람도, 좋은 학교에 못가서 안타까운 사람도 본인이다.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여도 성과가 없으니 마음엔 상처가 존재한다. 이런 마음 속 상처를 명절 밥상 앞에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은 심한 고통이다.
중년이 되면 날로 저하되는 체력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건강관리에 대한 부담이 마음 한켠에 자리한다. 간혹 들리는 동창의 부고 소식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때론 큰 마음 먹고 건강관리 계획을 세우지만 일상에 쫓기다 보면 작심삼일로 끝나기 일쑤다. 물론 마음 속 고민의 크기는 날로 자란다. 의학적으로 어떤 종류건 상처는 자극할수록 덧나며 통증도 심해진다. 아물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며 때론 원인이 제거될 때까지 고통이 지속된다. 혹여 '곪은 건 빨리 터뜨려야 낫는다'며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상처가 덧나 심각한 합병증을 초래한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가족의 불필요한 관심이나 섣부른 위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독으로 작용하기 쉽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누군가를 비하하는 말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절대 금해야 할 일종의 언어폭력이다. 듣는 입장에서는 좌절감은 분노심이 일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예가 '엄친아 현상'이다. 엄친아 역시 위키백과를 검색해 보면 '무엇이든 잘하는 이상적인 엄마 친구의 아들의 줄임말로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는 용어. 20~30대에 중요한 스트레스로 작용하며 부정적 자아개념을 형성한다'고 규정한다. 이처럼 부모로부터 엄친아 '고문'을 받은 자식들의 냉소적 반란은 '나의 꿈은 부자 아빠 자녀 되기'라는 말로 대변된다. 성숙한 부모라면 만족스러운 자녀를 바라기 전에 부모는 스스로에게 '나는 과연 이상적인 부모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동양문화권에서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법칙으로 꼽히는 명언은 논어에 나오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는 뜻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하고 싶더라도 일단 표현하기 전에 반드시 '이 말을 듣는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를 점검해야 한다. 이는 아무리 나이가 어린 아이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야 할 원칙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 가득한 가족을 위해 내가 진심으로 도와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물론 있다. 바로 자녀건 부모건, 아픈 마음을 표현할 상황과 기회를 마련한 뒤 그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이는 정신과 상담 치료의 핵심인 '환기 요법(ventilation therapy)'에 해당한다. 환기 요법이란 마음속에 담아 둔 힘들고 화나는 일을 누군가에게 실컷 털어놓음으로써 속이 시원해지고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치료법이다. 어떤 문제건 개개인이 당면한 고민거리는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내 힘으로 해결해 주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만 있다면, 가족의 고민을 공감하면서 경청해 주는 일은 해줄 수 있다. 이번 추석 명절부터는 훈수나 조언 대신, 공감과 경청으로 진정한 사랑을 공유하는 아름다운 가족애를 실천해보자. 황세희 국립의료원 공공보건의료연구소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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