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첫 공판 女검사 조희진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
▲조희진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사진=최우창 기자]
[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유리 천장'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스스로 깨지 못하는 '내부 유리천장'도 있다. 남자와 여자가 사는 인류 역사에 여성 차별은 한 챕터를 장식할 만큼 깊고 오래된 텍스트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화하면서 외적 '유리 천장'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여성들에게 남아 있는 '내부 유리천장'도 하나씩 깨트려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조희진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검사장, 52)가 주인공이다. 조 검사장은 "여전히 여성차별이 존재하는데 이런 외적인 유리천장과 함께 여성 내부에 있는 유리천장도 하나씩 사라져야 할 요소"라고 강조했다. ◆내·외적 유리천장, 여성 스스로 깨트려야=세상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 검사장은 말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그 이해가 소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조 검사장은 "많이 달라졌는데 다른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여전히 모험이나 세상에 대한 도전보다는 안정적 일을 추구하려는 모습이 강하다"며 "이런 것들이 어쩌면 스스로 내부 유리천장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소통 없이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없다고 진단했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 만남에서 대화를 통한 소통이 조금씩 이뤄질 때 사회는 변화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조 검사장은 "24년 검사 경험상 사람을 만나면 얻는 게 참 많더라"며 "무엇보다 젊은 여성들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 만나 적극적으로 활동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리 천장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여성이 직장 내 성 차별 등으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제학 용어이다. '천장'은 승진을 방해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차별은 공식적 정책 등에는 드러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두고 '유리 천장'이라 부른다, ◆초임검사 시절, 법과 온정사이에서=조 검사장은 1990년 서울지검 검사로 첫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그것도 여성으로서 현직 첫 검사였다. 그동안 여검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배숙, 임숙경 검사 등이 있었는데 1985~86년 사이 검사를 그만두면서 조 검사장이 유일한 현직 검사였다. 형사부에서 일을 시작한 조 검사장은 초임 시절 법과 온정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했다. 한 번은 중국집 종업원과 사장 사이에 폭행 사건으로 종업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종업원이 폭력을 행사해 2주 정도의 상해를 입혔는데 조사 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종업원의 심정을 이해할 만한 사건이었다. 조 검사장은 "피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며 "증거를 통해 법리 해석을 하고 처벌을 해야 하는 검사와 한 인간으로서 조사과정에서 피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중간에서 조금은 힘들었던 경험이 많다"고 되뇌었다. 지적재산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건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경제기획원 시절 미국은 슈퍼301조를 들먹이며 우리나라의 지적재산권 침해에 대한 강한 압박이 있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예산까지 따로 편성해 지저재산권 단속에 나섰다. 위반한 사람들이 줄줄이 입건됐다. 조 검사장은 "검찰의 사명은 법을 집행하기 위해 증거를 수집해 나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며 "당시 지적재산권 침해로 입건된 피의자들을 일일이 조사한 결과 대부분 영세한 사업자였고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피의자들에게 '나쁜 놈'이란 잣대만을 들이대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가 판사와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지망하게 된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법조인으로서 길을 걷겠다는 것도 대단한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조 검사장은 "일제 강점기 때 부친께서 특정 대학의 강의록까지 배달받으면서 고학을 하셨고 사법시험에 응시하려던 생각까지 있었던 분이었다"며 "그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법대를 들어가게 됐고 사법시험을 본 것"이라고 말했다. 법대를 지망하게 된 배경에는 법대를 나오면 취직하는데도 보탬이 될 것이란 소박한 꿈도 있었다고 밝혔다. 여기에 자신의 성격을 두고 조용하고 차분하기 보다는 적극적이고 나서는 성격이어서 검사가 되는데 한 배경으로 꼽았다. ◆최초의 공판 여검사=법조계에서 검사의 역할은 상당하다. 그중 검사의 꽃은 '공판'에 있다. 공판은 말 그대로 공개된 법정에서 피의자, 증인을 출석시켜 법관 앞에서 변호사와 치열한 공방을 통해 검사가 구형하는 것을 말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법조인의 권위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조 검사장은 여성 최초로 공판 검사를 지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이 공판에 나선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여자가 어떻게 공판에 설 수 있느냐'는 편견과 인식이 강했다. 조 검사장은 이런 인식에 도전장을 던졌다. 자신의 동료 남자 검사들은 공판에 나서는데 자신은 계속 송무 업무에만 배치됐다. 기회가 찾아왔다. 남자 공판 검사 선배 중 한 명이 단기 연수를 떠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 검사장은 공판에 나서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전달했고 마침내 공판에 나설 수 있었다. 조 검사장은 "지금은 여자 검사가 몇 백 명 되는 상황이니 공판에 나서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고 '여자가 어떻게'라는 인식도 없다"며 "당시에는 여자가 공판에 선다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물고 특이한 사건이었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조 검사장의 적극적이고 추진력 있는 성격이 한 몫 한 셈이다. 법을 집행하는 검사의 신분임에도 출산 휴가를 가는 것에 부담감이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 검사장은 "당시 2개월의 법정 출산 휴가를 다녀왔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심정적으로 부담이 많았다"며 "사회 분위기가 당시는 휴가는 쓰지 않고 안 가는 것이 예의였고 출산 휴가도 마찬가지였다"고 되뇌었다. 분골쇄신 자신의 안락보다는 조직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던 셈이다. ◆24년 검사생활, 소통이 답이다=그에게도 육아가 가장 힘든 일이었다. 조 검사장은 "친정부모와 남편이 많이 도와줬는데도 일과 육아를 같이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여기에 나의 경우에는 '첫'이란 타이틀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고 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24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선배로서의 하고 싶은 말을 꼽으라고 했을 때 조 검사장은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을 꼽았다. 조 검사장은 "내가 19기 인데 27기에 이르기까지 약 8년 동안은 매년 여 검사가 한명밖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당시에는 여검사 모임을 따로 만들어 대화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조 검사장은 "요즈음 젊은 세대를 만나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야기를 잘 안하는 흐름이 있더라"며 "듣고만 있는 소극적 자세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에게나 털어놓고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가 '적극적 대화'를 요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대화가 계속 이어지다 보면 서로 친밀감이 형성되고 마침내 소통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조 검사장은 "남자와 여자는 분명 다르다"며 "다른 점을 서로 인정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고 나아가 여성의 경우 도전하고 그것에 따른 성취감을 보여주는 것 또한 무엇보다 포기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라고 덧붙였다. ◆조희진 차장 검사는▲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81년 서울 성신여고 ▲1985년 고려대 법학과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 합격 ▲1990년 서울지검 검사 ▲1998년 법무부 여성정책담당관 ▲2005년 사법연수원 교수 ▲2008년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장 ▲2010년 대전지검 천안지청장 ▲2013년 검사장 승진, 서울고검 차장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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