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 칼럼]녹실회의 '끝장정신'과 현오석의 골

양재찬 논설실장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초기에는 지지부진했다. 강한 추진력을 갖춘 경제 수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인물이 한국일보 창업주인 백상 장기영. 40대 젊은 외부 인사의 부총리 입각을 경제기획원조차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새벽 4시부터 전화를 걸어 업무를 확인하고 지시하는 불도저 스타일로 관료들을 휘어잡았다.  장관들을 길들이기 위해 활용한 것은 심야 '녹실(錄室)회의'다. 당시 서울 세종로 기획원 3층 부총리 집무실 옆 소회의실이 집합장소였다. 이 방 의자와 양탄자가 녹색이라 그리 불렀다. 일주일에 두 차례 공식 경제장관회의에 앞서 비공개로 열렸다. 일과를 마친 저녁 7시, 현안 관련 장관들만 참석해 결론 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계속했다. 주요 정책을 여기서 조율한 뒤 공식 회의에 넘겼기 때문에 무게감은 더 컸다. 녹실회의는 장 부총리 재임 3년 5개월 내내 한 주도 거르지 않았다. '열혈 카리스마 부총리' 김학렬도 녹실회의를 통해 장관들을 휘어잡고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진두지휘했다.  1986년 기획원이 과천청사로 옮겨지면서 부총리 집무실 의자는 자주색으로, 양탄자는 회색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경제정책의 산실이란 상징성 때문에 계속 녹실회의로 불렸다. 1990년대 중반 청와대 경제수석이 멤버로 추가된 '청와대 서별관회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라졌다. 그 녹실회의가 20년 만인 지난 17일 부활됐다. 현오석 부총리가 정부서울청사 18층 간이집무실에서 부동산 취득세 관련 3개 부처 장관과 금융위원장이 참석한 회의를 주재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취득세 인하 문제를 조정하지 않는다고 질책당하고, 여당 원내대표와 중진들까지 '안이하다' '안 보인다'고들 해 대자 존재감을 보여 주려 나선 모양이다.  회의소집 형식을 본뜨는 것만으론 현오석 경제팀이 리더십 위기에서 빠져나오긴 어렵다.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토론해 결정되면 책임지고 실행한 끝장정신과 추진력도 배워야 한다. 부총리가 적극 전면에 나서라. 새 정부의 경제 비전을 또렷이 제시하고,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고, 여당은 물론 야당과 국민을 설득하라. 부처 간 이해가 대립되는 문제는 밤샘토론으로 조기 결판내라. 시대정신과 경제환경 변화에 맞는 '현오석' 브랜드 정책을 제시해 추진하라.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문제가 생기면 깔끔하게 책임지고. 현 부총리가 사면초가인 데는 임면권자인 대통령에도 책임이 있다. 여러 군데서 미덥잖아하는 그를 고집했으면 경제부처 컨트롤타워에 걸맞은 힘을 실어 줘야 한다. 국무회의나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한 시간도 넘게 국정 현안에 대해 시시콜콜 지시하면 장관들이 '대통령 말씀' 받아 적고 이행하기 바쁘다. 큰 것만 직접 챙기고 부총리와 장관들이 알아서 할 만한 것들은 믿고 맡겨라. 그래야 각료들이 괜찮은 정책을 내려고 창의력을 발휘해 창조경제도 가능해진다.  새누리당도 경제난과 민생고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4ㆍ1 부동산대책의 한 축인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폐지와 아파트 수직증축 리모델링은 여태 국회 심의도 안한 채 북방한계선(NLL) 논란 등 정쟁을 일삼으면서 정부정책의 효과가 없다고 탓한다. 인사청문회가 늦어져 취임 넉 달도 안 된 부총리를 흔들기 이전에 국회에서 할 일부터 하라. 부총리의 리더십이 위협당해 조기 교체되면 청와대는 물론 여당도 부담이다. 코너에 몰린 현 부총리가 "축구는 개인기보다 골로 말한다"며 여권의 흔들기를 일축했다. 홍명보 감독이 새로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그제 첫 시합에서 21개의 슛을 쏘았으나 골은 없었다. 현오석 경제팀이 언제 골맛을 보느냐는 당ㆍ정ㆍ청이 서로 네 탓 않고 자기 몫 제대로 하기에 달렸다. 양재찬 논설실장 jayang@<ⓒ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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