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인생2막 50+]“커피는 내 인생의 소울메이트”

교장선생님서 바리스타로 변신한 윤원상씨

교장선생님이 바리스타가 됐다고? 반평생 책과 걸어온 고고한 ‘지성’이 예순 살 넘어 뜨거운 주전자를 잡고 손에 딱딱한 굳은살이 박혔다. 도전은 파격, 아우라는 품격 그 자체다. 그때부터였다. 커피에 푹 빠진 여인, 윤원상(67)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재수는 운전면허 하나로 족하다는 일념으로 커피를 파고들었죠.커피는 어찌 보면 스트레스다. 선택부터 경우의 수가 많다. 그 많은 커피가 저마다의 사연과 개성을 간직하고 있다. 몰라도 되지만 모르고 마시기엔 뭔가 허전하다. 이것저것 까다롭기도 하다. 보관할 땐 밀봉해 적정 온도에 맞춰 줘야 하고 유통기한을 엄수해 줘야 한다. 음식과의 궁합도 따져야 한다. 포도주처럼 생산지에 따라 맛과 향도 천차만별이다. 누가 추출하느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시간 또한 맛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복잡한 커피의 세계에 그는 교직생활을 갈무리하자마자 진갑(進甲)의 나이로 용기 백배, 과감히 뛰어들었다. 바리스타란 직업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경력 5년차. 정교한 손놀림으로 내린 그의 커피 솜씨를 맛보시라. 선입견은 보기 좋게 깨지게 될 테니까. 인생2막 커피 달인의 꿈을 이룬 위풍당당 그녀와 달콤 쌉싸래한 인터뷰를 가졌다. 섬세한 손맛 이탈리아 토박이들도 인정연일 쏟아지던 비가 그친 지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카페 ‘어린왕자’. 전시를 감상하면서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갤러리 카페로 알려진 곳이다. 하얀색 유럽풍 건물에 청량감 도는 푸른색 간판의 조화가 지중해 풍경을 연상시키며 눈길을 잡아끈다. 화초로 둘러싸인 멋스러운 야외 테라스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테이블 10여개가 놓인 40평 남짓한 공간이 펼쳐진다. 예술적인 사진과 그림들, 곳곳에 화분이 자리하고 한쪽에는 온통 녹색인 자연 정원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이 문화사랑방 같은 공간의 주인은 윤원상씨다. 식물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다. 바(bar)에서 이제 막 커피를 만들고 나온 그. “싱그럽죠? 도심 속 세련된 전원주택을 콘셉트로 카페를 꾸몄어요. 제가 워낙 자연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겉만 예쁘다고 미인은 아니지 않은가. 내면도 꽉 차야 아름다운 법이다. 어린왕자는 속까지 알찬 진짜 ‘미인’이었다. 좋은 원두와 뛰어난 커피 맛으로 입소문이 자자하니 말이다. 특색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화랑에 어깨를 맞대고 오밀조밀 넘쳐나는 삼청동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던 이유다. 윤 대표의 섬세한 감각과 손맛은 여기저기서 알아준다. 그 맛에 반해 단골이 되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커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토박이들도 들렀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갔단다. 이곳의 메뉴는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푸치노 등 에스프레소 베이스 커피와 핸드드립 커피, 생과일 주스, 샌드위치, 와플, 허니브레드, 팥빙수 등 다양하다. 그 중 필살기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여간해선 다른 데서 잘 볼 수 없는 사이폰 커피다. 화학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유리용기 기구와 알코올 램프를 이용해 가는 관으로 추출한다. “담백하면서 깊고 풍부한 맛이 일품입니다. 커피 내리는 과정이 번거롭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커피에 깔루아(멕시코산 리큐르)를 넣고 셰이킹(shaking)한 카페 라그리마는 윤 대표가 자신의 스타일을 가미해 개발한 커피. 깔루아 특유의 향기와 커피 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디저트로는 ‘엘비스 파운드 케이크’를 꼽는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와 관계가 있는 건가? 그렇단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매일 먹었을 만큼 좋아했다는데 레시피를 운 좋게 구할 수 있어 만들게 됐다고. “먹어봐야 참맛을 알 수 있다”며 윤 대표가 케이크를 내왔다. 한 입 베어 무니, 인터뷰하다 말고 입 안은 무아지경이다. 방금 구운 빵의 따뜻하고 폭신한 감촉과 캐러멜 시럽의 달달함, 생크림의 부드러움이 환상의 조합을 자랑한다. 이런 각각의 훌륭한 맛을 위해 그가 세운 원칙은 ‘좋은 재료로 저렴하게’다. 원두는 이탈리아의 고급 브랜드인 일리, 코스타도로를 사용하고 생과일 주스에도 비싸지만 뉴질랜드산 키위와 전북 고창산 복분자 등 최고 좋은 재료를 고집한다. 또 모든 식자재를 직접 깐깐하게 고른다. “카페 인기 비결이요? 우리 가족이 먹는 음식을 만들 듯이 정성에 올인 하는 것 외에 다른 건 없답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대충이 싫어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에 도전비엔나커피 주문이 들어왔다. 윤 대표의 손끝에서 창조되는 커피 미학을 잠깐 들여다봤다. 황금빛 크림 빛깔과 질감의 에스프레소를 뽑고 물을 타서 아메리카노를 만든다. 그 위에 듬뿍 얹히는 부드러운 휘핑크림, 모양과 높이가 예술이다. 기자도 바리스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어 잘 안다. 좋은 크레마(crema, 조밀한 황금빛 갈색의 거품)를 만들어내는 것, 휘핑크림을 흐트러짐 없이 올리는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지를. 윤 대표는 원래부터, 아주 오랜 동안 바리스타였던 것처럼 보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리스타가 될 그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는 1966년 첫 발을 내딛은 후 중·고등학교를 오가며 41년간 교직에 몸담은 천상 교육자였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언제부턴가 또 다른 즐거움을 준 게, 바로 커피였다. “커피를 곧잘 즐기곤 했는데 정작 편하게 마실 곳이 별로 없는 거예요. 순간, 내가 한 번 차려보자 싶었죠.” 2005년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삼청동 2층짜리 주택의 아래층을 개조해 홈바(home bar) 개념의 자그마한 커피집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카페에 전념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맛있는 커피를 내리며 음악을 듣고 책이나 읽으려고 했다. 한데, 같이 신나게 웃고 떠들고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손님이 늘면서 대충 할 수 없겠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커피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서 그는 바리스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남편과 자녀들도 적극 응원해 줬다. 2007년 금호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뒤, 곧바로 대학교 사회교육원 바리스타 6개월 과정을 수료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포르투갈 등 해외 커피 명소도 찾아다녀 견문을 넓혔다. 커피의 세계는 참으로 놀라웠다. 이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 커피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했다.민간 자격증이지만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굉장히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치므로 다양한 커피 메뉴와 레시피를 암기하고 익히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터. 가뜩이나 나이 지긋한 그에게 말이다. “워낙 교사 시절 공부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선지 생소하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다행이었죠. 그런데 들리는 얘기로 자격 필기시험이 60% 정도만 붙는다고 하데요. 무슨 대학 예비고사도 아니고…. 화학 분야 문제가 대다수여서 공부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걱정이 좀 되더군요. 여태껏 한 번도 시험에서 떨어진 적이 없는데…. 참! 딱 하나만 빼고요. 내 인생에서 재수는 운전면허 하나로 족하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커피를 파고들었죠.” 부단한 노력 덕분에 그는 첫 관문을 한 번에 통과했다. 다음은 20분 내 에스프레소 2~4잔, 카푸치노 4잔 제조 및 커피 기계 청소까지 말끔히 끝내야 하는 실기시험.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로 두 번째 관문도 잘 뚫었다. 이로써 정식 자격을 갖춘 바리스타가 됐다. 그런데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배우고 자격증을 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습득한 기술을 내게 맞게 단련시키며 나만의 감각으로 터득하는 일이 중요해요. 가령 커피를 추출할 때 내 손목의 힘이 작으니까 이 정도의 세기를 가하면 되겠구나 스스로 깨치는 거죠.” 그는 커피 기계를 소울 메이트 삼아 커피를 만들고 버리기를 거듭하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개거품’이라 부르는 성글고 못생긴 거품이 촘촘하고 고운 ‘벨벳거품’이 될 때까지, 까맣고 쓴 커피가 황금 비율의 최고 맛으로 재탄생할 때까지. 그렇게 채찍질하며 자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진정한 바리스타로 변신해 있었다. “다 늙은 나이에 무슨 바리스타냐, 자격증까지 굳이 딸 필요가 있느냐”며 비아냥거렸던 몇몇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다. 내친김에 칵테일도 배웠다. 앉은 자리에서 윤 대표가 ‘플레어 쇼’(병을 돌리는 기술)를 살짝 시범 보인다. 와~ 멋있는데? 이 모든 게, ‘어떤 일이든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에서 비롯된 결실이었다.

카페 ‘어린왕자’(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그윽한 향, 온기 훈훈한 사랑방으로 남기를 강북의 문화 허파, 이웃한 경복궁의 고풍스런 멋, 꼬불꼬불한 길의 살가움, 예술의 정취가 깃든 자연스런 공간. 삼청동이 풍기는 멋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소비자만 이 동네에 반한 게 아니다. 생산자도 매료됐다. 집을 고치기 이전에 이미 카페 입지로 점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게 윤 대표의 설명이다. 개개인이 자기 취향, 업종에 맞게 개성 넘치는 공간으로 새 단장하는 흐름이 삼청동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단다. 집 개보수비 2억원, 인테리어 1억원에 커피 및 와플·제빵 기계와 냉장고·냉동고 등 각종 설비 구입비까지 합치면 3억1000만원을 웃돈다. 월 매출은 1000만원 정도. 추운 겨울인 1~3월, 11·12월 비수기에는 600만원으로 뚝 떨어질 때도 있다. 여기에 매달 들어오는 210만원 정도의 연금을 더하면? “교사 연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자는 나지 않아요. 장사에 연연하기 보다는 제 자신이 커피를 즐기면서 손님들에게 온기 훈훈한 사랑방으로 남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래서 손님을 대할 때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체육시간 땀 흘린 아이들을 위해 냉장고에 시원한 수박과 아이스크림을 준비해 뒀던 그때 그 시절 교사로서의 마음 그대로가 묻어난다.인터뷰 내내 느꼈던 감상은 그의 일상이 열정 그 자체라는 것. 요즘엔 사진에 심취해 있다고 했다. 윤 대표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사는 말이 있다. 언젠가 캐나다 여행에서 만난 한 사람이 건넨 “인생에서 은퇴는 무덤으로 들어갈 때”라는 말이다.이코노믹 리뷰 전희진 기자 hsmile@<ⓒ 이코노믹 리뷰(er.asiae.co.kr) - 리더를 위한 고품격 시사경제주간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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