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황등석산에서 읽는 산업과 감각의 풍경
지하 80m, 다시 보이기 시작한 돌의 시간
채석장, 어떻게 청년들 감각에 닿았나
가끔 산사에 들러 오래된 탑과, 석불을 볼 때면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우리나라의 지질구조가 화강암이 많은 지형이 아니라 대리석이 많은 지형이었다면, 석굴암 부처님의 외모는 많이 달라졌을까. 또 전국 각지의 산사에 우뚝 선 석탑의 모습들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 황등석산은 화강암을 생산하기 위해 지하로 파내려 간 석산의 깊이, 수직으로 깎인 절벽의 결, 원형으로 둘러진 채석장 구조가 하나의 풍경을 이뤄 새로운 관광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 황등아트앤컬쳐
화강암은 그 단단함과 견고함으로 풍화와 부식에도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켜낸 뚝심으로 늘 우리 곁에 함께 숨 쉬고 있다. 다양한 지역에서 생산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에서 생산하는 '황등석'을 화강암 중 으뜸으로 평가한다.
뛰어난 품질 덕에 무려 삼국시대부터 이웃 나라 신라로 스카웃(?) 된 백제 석공 아사달 설화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익산 황등석의 역사는 돌을 다루는 기술과 미감이 함께 축적돼온 시간에 가깝다. 돌의 시간은 한동안 산업이라는 이름으로만 호명됐다. 캐고, 옮기고, 세우는 과정에서 돌은 오로지 용도와 규격, 강도와 효율로만 평가됐다. 황등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 덩이의 화강암이 국회의사당의 기둥이 되기까지, 그 사이의 풍경은 기록되기보다 생략되는 쪽에 가까웠다. 돌을 캐던 자리, 먼지가 날리던 절단면, 반복되던 노동의 리듬은 언제나 결과물의 그림자에 머물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산업은 자리를 비웠고, 남은 것은 뜻밖에도 '흔적'이었다. 지하로 파내려 간 석산의 깊이, 수직으로 깎인 절벽의 결, 원형으로 둘러진 채석장의 구조는 기능을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됐다. 목적 없이 놓인 공간, 쓰임을 다하고 멈춘 자리는 오히려 오늘의 시선과 가장 빠르게 연결된다. 요즘 젊은 세대가 이곳, 황등석산에 끌리는 이유도 어쩌면 그 지점에 있다. 설명보다 체감이 먼저 오는 장소, 과잉된 연출 없이도 서 있기만 해도 충분한 장면 말이다. 황등석산은 그렇게 산업의 언어에서 감각의 언어로 이행하고 있다.
돌은 더 이상 어디로 옮겨질 필요가 없고, 사람들은 그 돌이 놓였던 자리를 굳이 찾아 내려간다. 생산의 현장이었던 공간은 지금, 기록되지 않았던 시간을 직접 마주하는 감각적인 경험의 장소가 된다. 그 변화의 중심에 황등석산이 있다.
지표 아래 80m까지 파내려 간 이 채석장은 한 세기 동안 돌을 캐내던 산업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채굴된 황등석은 국회의사당과 대법원, 청와대 영빈관의 13m 화강암 기둥 등 대한민국 주요 건축물의 토대가 됐다. 돌은 이곳을 떠나 도시로 향했고, 황등석산은 오랫동안 배후의 공간으로 머물러 있었다.
이제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한다. 지난 10월 25일 문을 연 '익산 황등석산 문화예술공원 제1전망대'는 개장 한 달여 만에 방문객 2만 명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70%가 20~30대 젊은 세대다. 산업 유산을 되살린 공간 가운데서도,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황등석산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제1전망대 전경. 사방이 유리로 열린 구조 안에서 방문객은 절벽의 깊이와 결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특히 다이아몬드 와이어 톱 공법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수직 절개면은 채석장의 시간을 질서정연한 기하학으로 드러낸다. 사진 황등아트앤컬쳐
황등석산 제1전망대의 가장 큰 특징은 스케일이다. 지하 80m 깊이, 축구장 9개 넓이에 달하는 2만여 평의 채석장은 한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다. 원형으로 파 내려간 구조와 수직으로 떨어지는 절벽은 마치 거대한 건축물이 지하에 잠들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풍경은 흔히 '지하에 뒤집어 놓은 콜로세움'에 비유된다.
전망대는 이 장면을 가리지 않는다. 사방이 유리로 열린 구조 안에서 방문객은 절벽의 깊이와 결을 그대로 바라본다. 특히 다이아몬드 와이어 톱 공법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수직 절개면은 채석장의 시간을 질서정연한 기하학으로 드러낸다. 일몰이 가까워질수록 회색빛 돌산은 황금빛에서 붉은색으로 물들며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전망대 내부에는 채석장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미디어아트와 다큐멘터리가 상영 중이다. 공간은 관람과 휴식의 경계를 흐린다. 카페에서는 익산 특산물 고구마를 활용한 고구마 라테와 아인리페너가 시그니처 메뉴로 제공된다. 풍경과 지역의 맛을 함께 경험하도록 설계된 동선이다.
이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2026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제1전망대의 세 배 규모에 달하는 제2전망대가 조성 중이다. 3층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미디어아트와 소규모 공연, 전시 등이 가능한 구조다. 두 전망대를 잇는 산책로에는 황등석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채석 장비 등 근대문화유산이 전시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2031년까지 석산 전역을 문화예술공원으로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황등석산을 찾는 여정은 자연스럽게 황등시장으로 이어진다. 한때 3000명에 달했던 석공들이 모여들며 형성된 이 지역에서 탄생한 '황등비빔밥'은 돌과 노동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은 음식이다. 빨리 먹기 위해 고기 육수에 토렴한 밥에 여러 반찬을 한데 비벼 먹던 석공들의 식사는 지금도 황등시장에서 같은 이름으로, 3대를 이은 지역의 별미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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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캐던 자리, 그 돌로 세워진 건물, 그리고 돌과 함께 축적된 삶의 방식. 황등석산은 이제 그 모든 층위를 한 공간에 펼쳐 보인다. 파내려 간 깊이만큼, 이곳은 비로소 보이는 장소가 됐다.
김대동 황등아트앤컬쳐 PM 인터뷰
김대동 PM은 황등석산 프로젝트의 방향을 ‘덮는 방식’이 아니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폐석산을 재생한다고 해서, 무엇을 새로 얹는 데서 답을 찾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이곳에는 한 세기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거든요. 돌을 캐던 흔적, 절개면의 결, 원형으로 파 내려간 구조 자체가 하나의 서사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산업의 흔적이 시간이 지나 자연처럼 보이게 되는 순간, 그 장면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고 보여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해외의 여러 폐석산 재생 사례를 직접 찾았다. 캐나다 부차드 가든, 프랑스 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 영국의 에덴 프로젝트, 일본 나오시마까지 현장을 돌아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상적이었던 건 나라와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이 분명했다는 점입니다. 성공한 사례들은 모두 ‘훼손된 공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공간이 가진 시간을 존중하고, 문화와 예술을 통해 새로운 읽기 방식을 제안했어요. 황등석산 역시 같은 방향으로 가고자 합니다."
김 PM은 황등석산을 ‘과거 산업의 현장이자, 지금 세대가 시간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장소’라고 정의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설명이 많은 공간보다, 서 있기만 해도 이야기가 전달되는 장소에 반응합니다. 황등석산은 따로 해설을 덧붙이지 않아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기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프로젝트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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