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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발미'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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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발미'에서 생긴 일 프랑스 화가 오라스 베르네가 그린 '발미전투(Battle of Valmy)'[이미지출처= 런던 내셔낼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nationalgallery.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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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프랑스 대혁명사 초반에 등장하는 '발미(Valmy) 전투'는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역사의 분기점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의 문호 괴테도 발미전투에 대해 "1792년 9월20일 바로 이날, 이곳에서부터 세계사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규모 자체로만 보면 아주 작은 국지전에 불과했다. 프랑스군과 프러시아군이 발미 인근에서 대치해 양군 도합 500명 남짓 사상자를 낸 작은 전투였다. 전투 자체도 포격전만 몇 번 오고가며 열흘동안 대치하다 프러시아군이 물러나면서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열흘이란 시간을 번 프랑스 혁명정부는 제1공화국을 선포하고, 지방 의용군이 파리로 집결할 시간을 벌었으며 전세가 역전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발미 전투 직전까지 프랑스군은 연전연패만 거듭했다. 그해 7월부터 침공해 들어온 프러시아군은 유럽 최강의 부대였고, 파죽지세로 파리로 진격 중이었다. 프랑스군은 대혁명으로 주로 귀족으로 구성된 장교단이 궤멸돼 이제 막 징집된 농민들로 구성된 형편없는 부대였다. 남아있는 프랑스 장교들도 전투를 포기하고 평화협상을 호소하던 상황이었다.


당장 파리까지 순식간에 함락될 상황이었음에도 프러시아군은 기병대로 돌격하지 않고 몇차례 포격 이후 계속 미적거리며 대치하다가 물러났다. 프러시아군이 대치한 이유는 당시 프러시아군 사령관이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왜 공격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지는 전후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가 그가 죽고 나서 풀렸다. 그의 유품 중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 소유 보석이 무더기로 나왔던 것이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뇌물을 받고 일부러 진격속도를 늦췄던 것임이 밝혀졌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이미 대세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안이하게 진격속도를 늦췄지만 이것이 역사를 뒤집어버렸다. 발미의 승리로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역사 속에 묻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14년 뒤인 1806년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수도 베를린을 함락하 유럽 천하를 장악하게 된다. 아주 작은 국지전 하나가 가져올 파장을 전혀 예견치 못하고 안이하게 방심한 대가가 국가의 치욕으로 돌아왔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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