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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57] ‘라오콘 군상(群像)’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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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57] ‘라오콘 군상(群像)’ 앞에서 윤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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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삽화를 그리리라. 일생일대의 걸작을 그리리라. 라오콘의 조각 이상의 예술을 만들리라. (…) 이제서야 내 거울 속을 똑바로 보았구나. 소설의 주인공의 표정을, 내 표정을 똑바로 보았구나. 땅꾼이여. 라오콘의 후손이여. 잠시 내 모델이 되라. 내 그대의 괴롬을 후세에 전하리니 나를 믿으라.”


이효석의 ‘라오콘의 후예’(1941)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주인공 마란은 신문소설의 삽화를 담당하는데 그날따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힘들어합니다. 꺼지지 않는 애욕의 오뇌 때문에 괴로워하는 현대 남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리로 나갔다가 자기 뱀에 물려 괴로워하는 땅꾼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주인공. 그때서야 삽화의 영감이 떠오릅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신들린 듯 중얼거리며 걸작을 완성하는 게 소설의 결말이지요.


이효석은 이 소설에서 라오콘을 인간 괴로움을 표현하는 일생일대의 걸작으로 평가합니다. 그러고는 라오콘을 능가하려는 야망을 통해 ‘괴로움의 궁극도 아름다움!’이라는 예술가의 이상을 꿈꿉니다. 우리 소설가가 라오콘을 인류 예술의 대표작으로 인정하는 사례입니다. 그 작품. 원래 이름 ‘라오콘 군상(群像)’을 여기 바티칸 대성당 팔각정원에서 봅니다. ‘아폴로바라기’에 이은 ‘라오콘바라기’. 괴테의 조언대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눈을 떴다가 감아보다가 합니다. ‘인간 괴로움의 극한’에 대한 심안(心眼)이 열릴까 해서 말이지요.


라오콘은 아득한 고전시대, 지금부터 3천 년 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사이에 전쟁이 있던 시대의 인물입니다. 그는 트로이의 제사장. 좁혀 말하면 아폴로 신전의 신관이었습니다. 그리스 군인들이 퇴각하며 남겨놓고 간 목마를 성 안에 들여오는 걸 반대합니다. 서양문학의 원조인 호메로스의 ‘일리어스’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따라 그리스 군인들이 퇴각하며 남겨놓은 커다란 목마 속에는 특공대가 숨어 있었지요. 목마를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성 안에 끌어들여 잔치를 벌이다가 역습을 당하는 게 트로이 멸망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라오콘은 오디세우스의 계책을 알아차렸고 끝까지 반대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스 연합군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진의 책사입니다.


그 때문에 그리스를 지원하는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지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커다란 뱀을 보내서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질식시켜 죽입니다. 손목과 팔뚝이 떨어져 나간 채 커다란 뱀에 옥죄여 괴로워하는 라오콘 세 부자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 맹독이 몸에 퍼져 괴로워하는 표정. 두 아들을 구하지 못하는 무기력함. 터질 듯한 근육 하나하나, 미세한 혈관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솜씨가 압권입니다. 작품만 놓고 보면 희대의 걸작인데 역사의 깊은 속을 보면 상황이 달라지지요.


[윤재웅의 행인일기 57] ‘라오콘 군상(群像)’ 앞에서

이 작품은 승리한 쪽에서 만든 우월감의 징표가 아닐까요? 트로이 전쟁은 태양의 신 아폴로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 사이의 대리전쟁인지도 모릅니다. 승리한 해양세력은 적들의 패배를 ‘괴로움의 극한’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싶지 않았을까요? 이 작품의 원형은 기원전 150~50년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이며 현재의 작품은 이를 모방해 기원 후 1세기에 제작된 대리석 조각입니다. 트로이 전쟁 천 년 뒤의 작품이란 뜻이지요. 고대 그리스에 이어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던 시대의 산물입니다. 변방에 있던 트로이에 대한 그리스-로마의 우월감이 여기 어찌 개입하지 않겠습니까?


서사시의 한 부분이니까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과 인과관계가 분명한 플롯이 있지요. 신의 복수는 저리도 끔찍한데 마음 가라앉혀 바라보면 인간의 건강한 몸과 격렬한 감정이 드라마틱하게 나타납니다. 돌이, 대리석이, 서늘한 뱀의 촉감이, 살아서 꿈틀거립니다. 아찔한 독과 숨 막히는 고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지요. ‘살아 있는 모든 게 괴로움’이라는 부처님 말씀은 실감나지 않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 고통은 자기 것인 양 통절합니다. 교리보다 앞서는 감각의 체험. 생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것은 아무래도 종교의 가르침보다 예술입니다.


1506년 로마의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 인근의 포도밭에서 이 놀라운 작품이 발견되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밭주인에게 매입하여 교황청 소유로 확정합니다. 바티칸 박물관 5백년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명품이기는 한데 잡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껄끄럽습니다. 성모와 예수의 모습을 새긴 ‘피에타’처럼 성당 본관에 자리하지 못하고 비만 겨우 피하는 정원에 전시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폴로상과 나란히 보는 라오콘 군상. 그 옆에 헤르메스상, 페르세우스상, 흥미진진한 신화 속 주인공들….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뜨끈뜨끈한 욕망의 캐릭터들. 그들도 답답한 안쪽보다는 시원한 바깥이 좋을 테지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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