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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민간인에 총부리, 좌우 피의 보복 '한국판 제노사이드'
최종수정 2019.07.12 14:00기사입력 2019.07.12 14:00

광란의 학살 '묵언의 실천' 강요한 사회…한국전쟁 전후 아픔의 역사, 진실 알리는 사회 공감대가 과거사 청산의 첫걸음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마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사람의 핏물이 마을 곳곳을 적셨다. 시체가 널브러진 채 방치됐다. '광란의 학살' 현장에서 간신히 목숨을 지킨 사람이 있었다.


지옥을 연상하게 하는 학살의 순간을 먼발치에서 몰래 지켜본 이도 있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묵언의 실천'을 강요당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사회에서의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질 뿐이다. 문제는 좌익 활동과 무관하게 학살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억울하지만 말을 꺼낼 수 없는 이유, 누구도 진실을 향해 귀를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민간인에 총부리, 좌우 피의 보복 '한국판 제노사이드' 지난해 11월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민은행 서관 앞에서 열린 과거사법 재개정 촉구를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에서 유가족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국회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와 ‘사회적공론화미디어투쟁단’ 등이 주최하는 이날 행사는 백비(白碑) 즉 무덤도 이름도 없는 원혼들을 위하여 과거사법 제개정 촉구를 위해 열렸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삶의 고통은 온전히 피해자 가족의 몫이었다. 죽음의 대상이 된 이들의 후손들은 교사나 공무원이 되기 어려웠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신원조사'라는 이름의 올가미가 대를 이어 가족들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할 세월이 지난 이후에야 정부는 그들의 사연을 경청했다. 하지만 문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멀다. 한국판 '제노사이드(대량학살)'는 현대사의 그늘 아래에 감춰져 있었다.


'한국 현대사와 국가폭력(푸른역사 펴냄)'은 기억 자체가 고통인 제노사이드의 실체를 폭로한 책이다. 홍순권 동아대 교수 등 6명의 학자(활동가)가 정부 기관의 조사 결과 등을 토대로 굴곡진 역사의 민낯을 폭로했다.


일제강점기, 좌우 이념의 대립, 분단의 역사, 한국전쟁, 독재 권력의 집권을 경험하는 동안 한반도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멍이 들었다. 특정 지역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1950년을 전후로 제주, 영광, 경산, 대전, 여수, 고양 등 전국 각지에서 비명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민간인에 총부리, 좌우 피의 보복 '한국판 제노사이드'


국가가 민간인을 향해 총탄을 겨눈 사건의 시발점은 1946년 10월 대구 사건이다. 당시 시민 1000여명이 거리에 나섰다.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시위는 경북 칠곡과 영천 등으로 번졌다. 시위는 격화됐고 경찰의 발포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혼돈의 시기, 국가 폭력의 독버섯은 점차 힘을 확장하고 있었다.


제주 4·3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의 경찰 '발포 사건' 이후 제주도에 핏빛 광란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이념 대립은 수많은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얼마나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정도였다. 일부 조사기관에서는 3만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른바 '부역자 처단'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목숨을 마음껏 유린했다. 초토화 작전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제주 중산간 지역 마을 95% 이상을 불태웠다.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제주도민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했다. 10세 이하 어린이나 60세 이상 노인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제주 곳곳에 퍼진 '비명의 메아리'가 육지에 상륙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4·3 사건은 사실상 금기어로 취급됐기 때문이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덧없이 세월만 흘려보냈다.


1948년 여순 사건도 해방 이후 좌우 이념 대립이 빚은 현대사의 아픔이다. 반란군과 진압군의 충돌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이번에도 반군 협력자 색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반군 가담자 심사는 외모,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과 고발, 강요된 자백에 근거했다. … 주민이 서로를 지목하게 하는 손가락 총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착각이나 개인감정에 의해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 책에 담긴 일부 내용이다. 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상황이 이렇게 허술하고 황당할 수 있을까. 광기의 시간은 공동체 파괴라는 또 다른 폐해를 불러왔다.


1950년 6월 시작된 한국전쟁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전황(戰況)에 따라 무고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부역자들을 가려내는 피의 복수극이 벌어졌다.


[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민간인에 총부리, 좌우 피의 보복 '한국판 제노사이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자 충남 당진에서는 우익 인사와 가족들 200여명이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지방의 좌익 세력이 학살극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화도에서는 부역자 가족을 처단한다는 명분에 따라 우익 세력 주도의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고양에서는 인민군에 의한 공무원·우익 인사 살해 사건이 일어난 뒤 피의 보복이 이뤄졌다. 경찰과 의용대가 중심이 돼 부역 혐의자 색출에 나선 것이다.


"수직굴인 금정굴에 꿇어앉힌 후 조준 사격을 가했다. 주민들은 17m 깊이의 굴 안으로 떨어졌다."


당시 사건을 목격한 이의 증언이다. 150여명의 주민이 금정굴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9월 금정굴에서 수많은 유골이 발굴된 이후 세상에 충격을 안겼다. 희생자 상당수는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 주민이었다. 부역 행위와 무관하게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이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1950년 7~8월 경산 코발트 광산 집단 사살도 마찬가지다. 당시 군과 경찰은 형무소 재소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코발트 광산에서 사살했다. 희생자가 수천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2005~2007년 조사 과정에서 수백여 구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의혹의 실체가 일부 드러났을 뿐이다.


책에 담긴 사연, 세상에 공개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은 고통 때문일까. 마음으로 고통을 삭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생을 마감한다고 역사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질까. 그날의 진실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는 사회의 공감대, 그것이 과거사 청산의 첫걸음이다.



류정민 정치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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