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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64] 옛 전차 경기장에서

수정 2020.02.11 16:34입력 2019.10.18 09:43
[윤재웅의 행인일기 64] 옛 전차 경기장에서 윤재웅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최대의 경기장'이란 뜻입니다. '키르쿠스'는 서커스의 어원. 로마 경기장이 스포츠 경연장이라기보다 흥행 오락장임을 알려주지요.


팔라티노 언덕 남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거대한 공터. 여기가 키르쿠스 막시무스입니다. '벤허(1959)'의 명장면을 떠올리는 분은 러닝타임 9분간의 숨 막히는 전차 경주 장면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영화는 세트장에서 촬영했지만 당대에 전차 경주가 열리던 곳은 바로 여기였지요.

유대인 죄수 출신과 로마에서 파견된 현지 사령관 사이의 격렬한 레이싱을 보여주는 영화 시나리오는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에 전차 경주장을 마련합니다. 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출발 신호를 보내지요. 관중석 중앙에 자리한 VIP석에서 일어나 흰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4두마차 아홉 팀이 참가해서 경기장 아홉 바퀴를 돕니다. 스릴과 서스펜션, 긴박한 장면들이 속도감 있게 이어지면서 손바닥에 땀이 납니다.


유대인 죄수 출신 벤허는 로마 사령관 메살라를 꺾고 우승을 차지해서 현지 주민들의 자긍심을 고조시키지요. 우승이 확정되자 로마로부터 압제를 당해 서러워하던 유대인들이 경기장 안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경기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로마를 이긴 유대!

그러나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잠깐 등장하는 예수의 메시지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무력이나 경기를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상대방을 대하는 게 영원한 승리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전차 경주란 무엇입니까. 타인을 이기고 싶은 정복의 욕망이 미친 질주의 행위로 표현되는 양식입니다. 속력을 줄이지 않은 채 곡선 구간을 회전하는 게 가장 어려운 기술인데 원심력을 이기지 못해 튕겨져 나가기 일쑤입니다. 빨리 달려야 하기 때문에 전차의 무게도 가벼워야 하지요. 자칫해서 옆의 마차와 부딪치기라도 하면 달리는 중에 마차가 분해되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위험한 경기. 용기와 지략과 경험이 필요하고 투자자도 중요합니다.


전차 경기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종목인데 로마가 이를 받아들여 신을 경배하는 축제 행사에 활용함으로써 민심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황제에겐 시민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는 최적의 무대. 시민들에겐 콜로세움의 검투 경기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오락. 투자자들에겐 모험적 상품이 되는 것이지요. 영화 속의 아랍인 마주(馬主)이자 경기 투자자는 벤허가 우승함으로써 4배의 배당금을 받습니다.


돈과 사람이 모이다보니 전차 경기장 주변에는 상점과 음식점과 점성술소와 매음굴까지 뒤섞인 시장이 형성됩니다. 모든 게 풍족한 로마. 사회 법제는 잘 정비되어 있지만 마음의 탐욕과 허영은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64] 옛 전차 경기장에서

64년 7월18일. 네로 황제 재위시에 여기 어지러운 시장터에서 화재가 일어나 로마 시가지를 잿더미로 만드는 대재앙이 발생합니다. 민심이 극도로 나빠지자 황제는 희생양을 찾지요.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박해가 심해지는 가운데 예수의 제자 베드로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그가 순교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황제의 경기장이 따로 있었는데 지금의 바티칸 성당 자리입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경기장 규모가 로마보다 작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은 황량한 공터지만 길이 621m, 폭 118m에 이르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웅장한 스펙터클은 압도적입니다. '벤허'처럼 말 네 마리가 달리는 4두마차 경주는 최대 12팀이 참여해서 7바퀴를 돌았다고 하네요. 8㎞ 경주. 현대의 경마보다 훨씬 많이 달리는 고된 노동입니다. 로마 시민 15만 명이 이 경기장에 들어차서 자기가 응원하는 말과 기수를 향해 괴성을 지릅니다.


세계적 도시 로마 한복판. 복잡한 도심 속의 불가사의한 공터. 오늘 이 황량한 벌판을 걸어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명소보다 한가해서 좋습니다. 구름이 옛날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하려 하자 입 없는 구름 대신에 바람이 나섭니다. 경기장의 괴성 속에서 한 시민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옵니다.


"여러분! 위대한 작가 수에토니우스가 '황제의 권위는 빵과 키르쿠스(Circus)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황제가 시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러겠소? 돈 가진 자 주머니를 털고 시민들을 눈 먼 열광에 빠뜨려 자신을 비판하는 입을 빼앗으려 합니다. 권력의 이런 수작은 여러 천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전차 경기 선수 중엔 노예도 많지요. 이들이 우승하면 신분을 해방해 줌으로써 관용을 과시합니다. 돈도 많이 벌게 해주지요. 노예 우승자가 영광의 승리자가 되고 부자가 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황제의 은덕이 머리 위에서 비치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는 정치에서 멀어집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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