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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규의 야구라는 프리즘]역사의 사법화는 오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수정 2021.06.17 13:00입력 2021.06.17 13:00

특정상황에서 선수가 어필해야 심판 판정 내리는 야구 '어필 플레이'
심판에게 막강한 권한 주지만 그 한계 또한 인정하기 때문
역사 왜곡방지 심판 만드는 법안, 사법부에 역사 판정권한 부여 비판
오심 가능성 없다 장담 못해

[최민규의 야구라는 프리즘]역사의 사법화는 오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2011년 5월 3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 7번 타자 채태인은 한국야구위원회(KBO) 리그 역사에 남을 실수를 저질렀다.


채태인은 0-0으로 맞선 2회초 1사 상황에서 1루 주자였다. 타석의 신명철이 외야 우중간에 떨어지는 안타성 타구를 날렸다. 이미 2루를 밟았던 채태인은 타구가 잡힐 것으로 보고 2루를 찍고 1루로 돌아가려 했다. 롯데 외야진이 포구에 실패해 채태인은 3루로 달려야 했다. 그런데 2루를 다시 밟지 않고 내야 잔디를 가로질러 3루로 내달렸다. 외야 송구를 받은 롯데 2루수 조성환은 2루 베이스를 터치한 뒤 3루로 달려와 베이스를 밟고 있던 채태인을 태그했다. ‘누의 공과’에 따른 아웃. 야구 규칙상 주자는 진루 또는 역주하면서 베이스를 순서대로 밟아야 한다. 채태인에게는 "콜럼버스처럼 신항로를 개척했다"는 찬사 아닌 찬사가 따라붙었다.

이 플레이에서 채태인의 아웃은 조성환의 태그로 완성된 게 아니었다. 태그와 함께 롯데 3루수 황재균은 윤상원 3루심에게 "채태인이 2루를 밟지 않았다"고 어필했다. 윤 심판은 2루심에게 확인을 거쳐 어필을 받아들인 뒤에야 아웃을 선언했다. 만일 롯데 야수진이 어필하지 않았다면 채태인은 3루 점유권을 얻을 수 있었다. 야구에서 독특한 ‘어필 플레이’다. 조성환이 2루를 터치했을 때 2루심이 바로 아웃 콜을 하지 않은 것도 2루에선 어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필이 없으면 심판은 아웃 판정을 내려선 안 된다.


어필 플레이는 미국 야구에서 1860년대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규칙상 명문화는 1876년 이뤄졌다. 현존 최고(最古)의 메이저리그인 내셔널리그가 첫 시즌을 치른 해다. 이해 내셔널리그 규칙은 주자가 아웃되는 상황을 17가지로 구분했다. 15개 상황에서 심판은 태그나 베이스 터치에 의한 풋아웃(자살)이 이뤄지면 곧바로 아웃을 선언해야 한다. 하지만 ‘누의 공과’와 타자 주자가 1루를 밟은 뒤 진루 의사를 보인 오버런에 대해서는 "수비 측의 어필을 기다려야 한다"고 규정했다. 오늘날 규칙에선 어필아웃이 적용되는 상황이 4개로 늘었지만 어필이 없으면 아웃도 없다는 원칙은 유지되고 있다.

주자가 1, 2, 3루를 차례로 밟고 홈으로 들어와야 득점이 인정되는 건 야구가 시작될 때부터 정해진 규칙이다. 심판이 베이스 하나를 건너뛴 위반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수비 측이 어필하지 않으면 페널티가 주어지지 않는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야구 경기는 심판 한 명만 배정됐던 단심제였다. 1910년에야 공식적으로 2심제가 시작되고 이후 4심제로 변했다. 심판의 눈은 두 개뿐이다. 초창기 야구 경기에선 심판의 사각을 노려 고의적으로 1루에서 3루, 2루에서 홈으로 직행하는 반칙이 빈번했다. 당연히 판정 시비도 뒤따랐다. 그런데 야구에서 아웃이나 세이프 판정은 최종적이며 번복불가능하다는 게 원칙이다. 심판이 속아넘어갔어도 판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상대의 반칙과 실수를 잡아내는 책임을 선수에게 일부 이전하는 대신 판정을 유예한 게 어필 플레이다. 야구는 결국 심판이 아닌 선수가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은 "분쟁이 잦은 판정에서 심판의 독단을 피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허운 KBO 심판위원장은 "상대 주자가 베이스를 정확하게 밟았는지 수비 팀이 확인해야 한다”며 “베이스를 건너뛴 선수에게 심판이 어필 없이 아웃을 선언한다면 수비 팀을 도와주는 불공정 행위"라고 설명했다.


모두가 야구장에서 뛰는 선수는 아니다. 어떤 이들,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는 심판 격인 사법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힘과 책임을 모두 갖고 있는 이들도 너무 자주, 너무 쉽게 심판에게 판정을 요구한다.


역사학회 등 21개 학회와 연구자 단체는 지난 9일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달 13일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2명이 발의한 ‘역사왜곡방지법안’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이 법안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거나 관련 역사에 대한 왜곡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며 ‘진실한 역사를 위한 심리위원회’라는 ‘심판’을 둔다는 게 뼈대다. 성명서는 법안이 "역사의 심판관을 법률로 규정"해 "수많은 쟁점을 안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정치 변동에 따라 사법적 단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성명서의 제목은 ‘역사의 사법화 현상을 우려한다’이다. 한국 정치는 문제 해결 능력을 잃고 사법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바로 전직 검찰총장이 퇴임과 함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르면서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사법부에 역사를 판정할 권한까지 부여하려 한다.


야구에 어필아웃이라는 룰이 있는 것은 심판에게 불가역적인 판정을 할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면서도 그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 야구는 잦은 오심과 판정 시비가 나오는 영역에서 선수에게 일부 책임과 권한을 주는 방향으로 심판에 대한 신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오늘날 한국인의 사법 신뢰도는 그때 미국 야구 선수들이 심판에 대해 가졌던 신뢰보다 과연 높을까. 사법의 역사 판정에 ‘오심’은 없을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국야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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