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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광장'에 갇힌 숨소리…무채색 동토 녹인 찰나의 사랑[슬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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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솔 감독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
로맨스 외피 쓴 북한 체제 해부학
소음과 어둠으로 축조된 '보이지 않는 감옥'

텅 빈 '광장'에 갇힌 숨소리…무채색 동토 녹인 찰나의 사랑[슬레이트]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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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국경을 넘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어떤 국경은 사랑조차 얼어붙게 만든다.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은 평양 주재 외국인 외교관 보리와 평양 교통보안원 복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단순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분단 버전은 아니다. 멜로의 외피를 쓴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텍스트다. 김보솔 감독은 두 남녀의 애절한 감정선을 따라가되, 그들이 서 있는 북한 사회의 공기를 포착하는 데 더 많은 공력을 쏟는다. 그 결과 영화는 통제된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질식하고, 또 어떻게 희미하게나마 호흡하는지 증명한다.


사회적 주제 의식은 스크린을 채우는 독특한 작화에서부터 드러난다. 영화는 관객이 기대하는 애니메이션의 화려함 대신 채도가 낮은 회색, 칙칙한 녹색, 그리고 선전물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들의 윤곽선 역시 매끄럽지 않다. 투박한 질감은 생기가 거세된 무채색의 도시가 삶의 터전이 아니라 거대한 수용소임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 삭막한 캔버스 위에서 두 연인이 마주 보는 순간에만 미세하게 피어오르는 노란 불빛은, 그래서 더욱 애처롭고 위태롭게 다가온다.


텅 빈 '광장'에 갇힌 숨소리…무채색 동토 녹인 찰나의 사랑[슬레이트]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 스틸 컷

작화가 묘사하는 황량함은 공간의 아이러니와 연결된다. 제목인 '광장(Square)'은 본래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개방된 공간이다. 극 중에선 철저히 비어 있거나 동원된 군중만으로 채워진다. 두 남녀 또한 사랑을 속삭이지 못한다. 늘 어둠이 드리운 골목이나 감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밀실을 찾아 헤맨다.


시각적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청각적 폭력이다. 평양의 거리는 조용하지 않다.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선전 방송, 군화 발소리, 날카로운 사이렌이 연신 공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개인의 사유마저 잠식할 정도다. 반면 연인들이 함께하는 순간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의 연속이다. 들켜서는 안 된다는 극한의 긴장감이 만들어낸, 비명 없는 비명과 같다.


상투적인 반공 영화나 신파극으로 흐를 수 있는 서사에 무게중심을 잡는 인물은 통역관 명준이다. 체제의 수호자이자 두 남녀를 감시하는 '눈'인 그는,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압권은 그림자 속에서 연인들의 절박한 눈빛을 목격하며 자기 내면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인간성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그가 이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을 주선하는 동력이 된다. 자비는 체제에 대한 거창한 반역이 아니다. 숨 막히는 기계 부품으로서의 삶에서 스스로가 '피가 도는 인간'임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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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광장'에 갇힌 숨소리…무채색 동토 녹인 찰나의 사랑[슬레이트]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 스틸 컷

애니메이션 '광장'은 이 애달픈 연심(戀心)을 빌려, 사랑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의 불모성을 응시한다. 광장은 닫혀 있고, 사랑은 좌절된다. 하지만 그 차가운 동토의 땅에도 심장 뛰는 사람들은 있다. 이들의 미약한 온기를 건조한 작화로 포착해 낸 이 작품은, 역설적인 진실 하나를 증명해 낸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광장'은 거창한 이념의 무대가 아니라, 오직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숨 쉴 수 있는 아주 좁고도 위태로운 틈새였음을.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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