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 애환부터 1000만 관객 환희까지
시대를 비춘 거울, 별이 되어 영면하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안성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5일 세상을 떠난 안성기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영화산업의 부침을 온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페르소나'였다.
1957년 5세의 나이로 데뷔한 고인은 17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이 숫자가 위대한 이유는 '단절 없는 생명력'에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아역 출신이 성인 연기자로 성공한 사례는 안성기가 유일하다. 1970년대 암흑기를 지나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 1990년대 기획 영화, 2000년대 1000만 영화 시대를 모두 주연으로 관통했다.
1980년대, 억눌린 시대의 '슬픈 자화상'
안성기를 '국민 배우' 반열에 올린 건 1980년대였다. 이장호, 배창호 감독과 손잡은 그는 군사정권 시절 억눌린 청춘과 소시민의 얼굴을 대변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중국집 배달부, '고래사냥'의 노숙자, '칠수와 만수'의 간판장이까지.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고 어수룩했지만, 시대의 모순을 꿰뚫는 날카로운 진실을 품고 있었다.
고인과 13편을 함께하며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배창호 감독은 2017년 특별전 대담에서 "안성기의 연기에는 계산이 없다. 그의 얼굴에는 그 시대 우리가 겪었던 가난과 슬픔, 그러면서도 잃지 않았던 희망이 동시에 묻어난다"며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섰다"고 회고했다.
"관객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주름마저 연기한 장인
1990년대와 2000년대,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투캅스'의 비리 형사로 코믹 연기의 정점을 찍었고, '실미도'에서는 1000만 관객의 심장을 울렸다.
안성기를 지탱한 건 화려한 스타성이 아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숭고한 철학이었다. 고인은 과거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기론을 담담히 밝힌 바 있다. "나는 칠순이 넘어서도 현장에 있는 배우를 꿈꾼다. 주름이 늘면 느는 대로, 흰머리가 나면 나는 대로 관객과 함께 늙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내 삶이고 내 연기다."
스크린 밖에서도 '진짜 어른'
그는 영화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투캅스', '라디오 스타' 등에서 호흡을 맞추며 그를 친형처럼 따랐던 배우 박중훈의 평가는 고인의 인품을 짐작게 한다. 한국영화 100년 기념 포럼에서 "안성기 선배님은 저에게 배우이기 이전에 위대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도 단 한 번도 거만해진 적이 없었고, 언제나 후배들에게 자신을 낮췄다"면서 "그는 우리 모두의 '큰형님'이었다"고 말했다.
지금 뜨는 뉴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의 최전선에 섰고, 영화인들의 복지와 권익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안성기.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던 영원한 현역. 거목은 쓰러졌지만, 그가 남긴 170개의 얼굴은 한국 영화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