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처리 지연이 일상 된 사법현실
정치보다 민생 불편 우선한 제도를
필자가 초임 검사 시절 선배 검사들에게 들은 말이 있다. "형사사법은 신속과 정확이라는 두 개의 목표가 있는데 그중 하나를 고르라면 신속한 사건처리가 더 중요하다. 사건처리를 지연시키면 다른 절차를 밟아 피해구제를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사건처리를 미루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검사라면 누구나 지켜온 직업적 소명이었고, '3개월 초과 사건'을 몇건 남기는지를 인사평가에 반영해 왔다.
요즘 이런 전통과 관행은 먼 옛날이야기가 된 듯하다. 요즘 고소·고발이나 송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은 하소연뿐이다. 언제 사건이 처리될지 예상할 수 없어 마냥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1심 민사 합의 사건 판결은 2017년 평균 293일 만에 처리되었는데 2024년에는 약 437일로 늘어났고, 1심 형사 합의 사건은 2017년 약 150일에서 2024년 약 199일로 31% 가까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검·경의 형사사건 수사 지연은 더 심각하다. 최근 변론을 위해 방문했던 형사부의 한 고참 검사는 방안에 가득 쌓인 사건기록을 가리키며 이 모든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한숨을 지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과거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세계적으로 경이로울 정도의 효율성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잘 작동되던 사법제도의 이면에는 판검사들의 자긍심, 가정생활을 포기하면서 야근과 초과근무를 마다하지 않는 희생이 뒷받침해 온 것이라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림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과도한 집단적 엘리트 의식, 특정 사건에서의 정치적 편향, 효율 내지 성과 추구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단점이나 부작용보다는 장점과 순기능이 더 컸고, 그런 시스템이 그나마 일반 국민들의 민생을 보살펴 온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영미 속담에 '잘 돌아가는 것은 고치지 마라(If it ain't broke don't fix it')'는 말 있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놔두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고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우리 사법제도의 공과(功過)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가해 주지 않았다. 오로지 특정 정치 사건에서의 편향성만을 문제 삼아 '네편 내 편'을 가르고, 효율은 무시한 채 사법기관 힘 빼기에만 골몰해 왔던 것이 아닌가. 법원과 판사들에 대한 과도한 적폐몰이,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는 과격한 형사시스템 변경과 잦은 인사는 그간 사법시스템 유지의 근간이 되는 판검사들의 자긍심과 사기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냈다.
정치적 사건에 수많은 특별수사팀이 구성되고 재판을 장악하면서 민생사건은 뒷전에 밀린지 오래다. 일선에서 정치 사건과 무관하게 민생을 챙겨오던 판검사의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법원과 검찰에 대한 징벌적 제도개선과 압박은 재판권과 수사권 약화를 가져와 종국에는 국민들이 피해를 볼 것이라는 항변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투정으로 치부돼 왔다.
특히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는 형사법 개정은 검경 간의 힘의 균형과 상호견제를 약화하고 책임소재를 불명확하게 만들어 사건 지연과 수사의 질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이제 다시 법원을 개혁하는 한편, 검찰청을 폐지하고 수사권을 중대범죄수사청으로 넘기는 사법개혁의 2라운드가 시작됐다. 이제라도 국민의 관점에서 새로운 제도가 초래할 국민의 불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달라고 하면 과한 요구일까.
지금 뜨는 뉴스
이동열 로백스 대표변호사(전 서울서부지검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