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이 말하는 '은중과 상연' 30년 우정
"은중 엄마 앞에서만 10대로 돌아갔다"
촬영하면서 천상학에게 썼던 편지 공개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에서 류은중(김고은)과 천상연(박지현)은 친구이자 경쟁자다. 서로를 살리기도, 무너뜨리기도 한다. 웃고 있어도 둘 사이에는 격류가 흐른다. 꾹꾹 누른 감정이 터지면 멀어지고, 운명처럼 다시 만나는 일을 30년 가까이 되풀이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과 질투, 동경과 상처가 뒤엉켜 있다. 배우 박지현은 그 모든 감정의 바탕에 애정이 있다고 확신한다. "분노도 애정이 있으니까 나오는 거죠."
끝내 하지 못한 말
천상연은 솔직하지 못하다. 사랑하는 김상학(김건우)이 류은중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고선 마음을 숨기고, 류은중의 영화 프로젝트를 훔쳐 성공한 뒤에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해묵은 감정이 터져 나올 때, 주고받는 말들은 하나같이 비수 같다.
박지현은 자격지심에서 나온 방어라고 설명했다. "은중이에게 차마 부럽다고 고백하지 못한 거죠. 대신 나오는 말이 따갑지만, 애정 없는 사람에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놓아줄 사람이라면 그런 얘기조차 안 하겠죠."
천상연이 솔직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오빠(천상학)의 일기장을 엄마에게 보여줘서 오빠가 죽었다는 죄책감이 있잖아요. 유년 시절 상처 때문에 솔직함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들키면 안 된다, 큰일 난다는 생각이 강한 거죠."
천상연의 삶은 '아동기 부정적 경험(Adverse Childhood Experiences)'과 회복탄력성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유년 시절 애정을 받지 못해 공허함에 갇혀버렸다. 공백을 돈이나 일로 채우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반면 류은중에게는 어떤 이야기든 들어주는 엄마가 있고,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는 친구들이 있다. 천상연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 오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유일하게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은 류은중의 어머니(장혜진)다. 류은중의 영화 프로젝트를 훔치고도 그녀 앞에서만큼은 솔직하다.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돼요?"라며 온기를 부탁한다.
"나이를 먹어도 유일하게 10대로 돌아가는 순간이 은중이 엄마 앞이에요. 특히 수제비를 먹을 때,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을 온전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 속에는 그리움이 있어요. 자기 엄마(서정연)한테 받지 못한 사랑을 은중이는 계속 받고 있잖아요. '나도 저런 엄마 갖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에게 친구가 필요한 이유
박지현은 천상연의 20대부터 40대까지를 그려야 했다. 변화무쌍한 상황을 겪으며 외양도 심리도 달라지는 연기였다. 가장 어려운 감정은 말기 암에 주저앉는 40대. 프로젝트를 가로채고 멀어졌던 류은중에게 안락사의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뻔뻔해 보이지만, 박지현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은중이가 생각하는 상연이의 아이 같은 모습 아닐까요. 어떤 이는 자기 연민 같다는데, 타인의 동정을 혐오하는 사람이에요. 매사 오기로 자신을 넘어서려고 하죠. 생존이라기보다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 하는 욕구라고 생각해요. 그걸 은중이 앞에서 내려놓는 거죠."
그는 천상연이 류은중에게 받으려 하는 것이 위로와 사랑이라고 말한다. 서로에게 구원자이자 가해자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고 믿는다.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아이, 상처를 안고 자라는 청소년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어쩌면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다. 천상연에게 류은중이 손을 내미는 것처럼.
박지현은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관객들이 상연이를 보면서 '저건 나다'라는 동일시와 '저건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는 거부감을 동시에 느끼더라고요. 그런 상연이를 저는 꼭 지켜주고 싶었어요. 은중이처럼요."
"다음 생엔 내가 오빠의 세상이 되어줄게"
박지현에게 천상연을 떠나보내며 작별 인사를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촬영하면서 천상학에게 썼던 편지로 갈음하고 싶다고 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오빠에 대한 죄책감이 천상연의 삶을 지배하다시피 해서다. 박지현이 공개한 편지는 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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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호수 같던 천상학에게. 있잖아, 한때는 푸르다 못해 희고 흰 파도가 몰아치던 바다 같았던 네가, 갑자기 탁하고 잔잔하기 그지없는 호수처럼 변해서 나는 너무 미웠다. 그걸 바라보던 차디찬 내 시선이 그 호수마저 얼어붙게 했을까. 적어도 계속 흐를 수 있도록 바람을 불어볼걸. 내가 그 빙판을 깨 볼걸. 아니, 두드려라도 볼걸. 그랬다면 오빠가 다시 활개 칠 수 있었을까. 아니, 진작 왜 변했냐 물어나 볼걸. 그랬다면 적어도 얼어붙지는 않았을 텐데. 나한테 힌트라도 좀 주지. 내 방문을 한 번만 열어봐 주지. 내 방에 들어오고 싶었던 오빠의 진심을 알고 난 이제야 사실은 오빠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걸 알아버렸네. 너무 늦어버렸네. 그냥 네 멋대로 살지 그랬어. 마음껏 살아보지. 연약하고도 착한 오빠. 만약 다음 생에도 우리가 남매로 만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같이 걸어줄 거야. 그 생엔 내가 오빠의 세상이 되어 줄 거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이 나의 죄를 물으면, 그 벌 달게 받을게. 그럼 오빠를 조금 더 빨리 만날 수 있겠다. 그때 우리 다시 잘살아 보자. 보고 싶다. 곧 보아. 그곳에선 오빠가 잔잔히 영원하길 바랄게. 상연이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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