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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의성 사촌리, 은행나무 그늘 아래 '행단'을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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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숲 정신 이어 600년
선비와 의병의 마을에 부활하는 학문 유산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한 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기운이 감돈다. 마을 입구를 장엄하게 지키는 천연기념물 사촌 가로 숲, 600년 된 밤나무와 향나무는 고요하지만, 그 뿌리 아래에는 수많은 선비정신과 충절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행단(杏壇)'이 있다.

[르포] 의성 사촌리, 은행나무 그늘 아래 '행단'을 다시 세우다 의성군 점곡 사촌리 동구에 행정 권식 선생의 유허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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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와 의병의 마을, 사촌리의 위상

사촌리는 김자첨(金子瞻·1369~1454)이 조선 전기에 개척한 뒤,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영남 유학의 산실이었다.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룡, 천사 김종덕, 운암 권희순, 자락당 권수경, 사와당 권두정 등 조선 유학사에 이름을 남긴 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았다.


의병의 마을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수복 전투에서 순절한 권의국·권신국·권충국 삼 형제를 비롯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인물만 75명에 달한다.


또 문집을 남긴 인물도 90여 명에 이르러 학문과 절의의 고향이라 불린다. 기자가 마을을 걸으며 만난 후손들은 "이곳에서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에도 선비의 숨결이 서려 있다"고 입을 모았다.


◆ 권식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 횡단의 뿌리

사촌리 횡단의 시작은 안동 권씨 입향조인 행정(杏亭) 권식(1423~1485) 선생이었다. 그는 단종 승하 뒤 세조의 부름을 거절하고 낙향해 은행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공자의 숲을 본받아 학문과 절의를 후세에 남기고자 한 것이다.


그의 시문에는 "공자의 행단의 현송을 일찍이 따르지 못했으니(杏壇絃誦未曾從), 남겨 놓은 뿌리 캐어 스스로 심었노라(採得遺根手自封),자손에게 전하노니 정성드려 보살펴라 (寄語雲仍須勿剪), 뒷날 행단의 위용을 닮아감을 보리라 (佇看他日習儀容"고 기록됐다.


그러나 전란과 화재, 6·25 전쟁의 격랑을 거치며 세 그루의 은행나무는 결국 한 그루만 남았다. 다행히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나무 앞에 서니, 수백 년 세월을 견디며 절의와 학문을 지켜온 고고한 기운이 전해졌다.

[르포] 의성 사촌리, 은행나무 그늘 아래 '행단'을 다시 세우다 행정정사 복원 현장 후손들이 십시일반 모금으로 진행 중인 행단 복원 사업 의성 유림 정신 회복의 상징이 되고 있다.

◆ 복원에 나선 후손들, 다시 살아나는 학문 정신

조선 철종 때 건립된 기천리사가 일제 방화로 불타자, 후손들은 1934년 기천정사(의성군 문화유산 제38호)를 다시 세워 제향을 이어갔다. 현재는 후손들이 힘을 모아 행정정사에 행단을 복원하고 있다.


후손 권모 씨는 "행단 복원은 단순한 나무 심기가 아닙니다. 사라져가는 유교적 학풍과 선비정신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지요.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행단'이라는 고유 이름을 가진 공간"이라며 "선조들의 학문 정신을 오늘 세대에 잇는다는 책임감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원 사업에는 지역 유림과 학계의 관심도 쏠리고 있다. 학자들은 "사촌리 행단은 공자의 학문 정신을 한국적 상황에서 계승한 상징적 유산"이라며 "지역 차원을 넘어 한국 유학사의 중요한 문화자산"이라고 평가했다.

[르포] 의성 사촌리, 은행나무 그늘 아래 '행단'을 다시 세우다 사촌가로숲과 행단 천연기념물 사촌가로숲과 함께 어우러진 행단 전경. 선비정신과 자연유산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 문화유산에서 지역 자산

사촌리의 행단은 단순한 은행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선비정신의 상징이자 학문적 정체성이다. 동시에 의성이 지닌 문화·관광 자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학술관광은 행단과 기천정사, 사촌 가로 숲 등을 연계한 답사 프로그램은 영남 유학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 ▲교육자원은 청소년 인성교육, 전통 인문학 강좌와 연결하면 '살아있는 교과서'며▲문화 브랜드화는 의성의 대표 학문·문화 유산으로 '행단'을 브랜드화해 지역 축제, 학술대회, 관광 마케팅에 접목하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사촌리의 행단은 학문적 상징을 넘어, 의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문화·관광의 자산이다. 은행나무 그늘에서 시작된 선비정신이 오늘날 지역 발전의 씨앗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행단 복원은 곧 의성의 미래를 새롭게 쓰는 일이다.

[르포] 의성 사촌리, 은행나무 그늘 아래 '행단'을 다시 세우다 기천정사 전경 1934년 후손들이 세운 기천정사. 행단과 함께 의성 유학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다.

◆ 행단의 오늘, 그리고 미래

기자가 은행나무 그늘에 서자, 공자가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옛 숲의 장면이 겹쳐졌다. 한 그루의 나무를 넘어선 행단은 절의와 학문의 상징, 시대를 뛰어넘는 의성 사람들의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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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촌리에서 후손들이 다시 세우는 행단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곧 영남 유학의 부활이자, 한국 선비정신이 현대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다. 의성의 작은 마을 사촌리에서 시작된 이 울림은, 지역을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지조와 학문의 가치를 다시 묻고 있다.




영남취재본부 권병건 기자 gbg@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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