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IT 노동자 "신원 위장 후 美 업체 취업 외화벌이"

탈북 남성 英 BBC 인터뷰 "월 700만원 벌어 85% 北으로"

북한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후 여러 단계의 신분 세탁을 거쳐 미국·유럽의 기업들에 취업해 외화벌이했던 북한 출신 정보기술(IT) 노동자의 사연이 외신에 공개됐다.

2일(현지시간) 영국 BBC 방송은 진수(가명)라는 탈북 남성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BBC는 이 남성과 영상통화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진수씨는 북한의 자금 조달을 위한 대규모 비밀 작전에 투입돼 여러 해 동안 수백 개의 가짜 신분증을 이용해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원격 IT 업무로 돈을 벌어왔다. 그는 매월 적어도 5000달러(700만원)를 벌었으며, 일부 동료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고 밝혔다.

진수씨와 그와 동료들은 주로 10명 단위로 팀을 이뤄 일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의 85%가 북한으로 갔다며 "우린 이게 강도질이라는 것을 알지만, 운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며 "그래도 북한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낫다"고 말했다.

진수씨와 같이 중국, 러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파견돼 이런 수법으로 외화벌이에 동원되는 북한 IT 노동자는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안보리가 지난해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비밀 IT 인력들은 매년 2억5000만~6억 달러(3500억~8300억원)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형태의 사업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원격 근무가 보편화된 시점부터 급성장했다.

북한이 IT 노동자들을 외국에 파견해 일을 시키는 이유는 외국은 북한보다 인터넷 접근이 자유롭기 때문에 일을 보다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국적을 숨겨 서방권 출신으로 그곳에 사는 것처럼 가장해야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고, 국제 제재를 피할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신분 세탁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중국인인 척하면서 헝가리·튀르키예 등에 사는 사람들에게 연락해 수입의 일정 비율을 줄 테니 신원을 빌려달라고 제안한다. 이렇게 빌린 신원으로 다시 서유럽 사람들에게 접근해 서구인의 신분을 확보하는데, 진수씨는 특히 영국인을 대상으로 할 때 성공 확률이 높았다고 전했다.

진수씨는 "프로필에 '아시아인 얼굴'을 올리면 절대로 취업 못 한다"고 강조했다. 취업 지원 절차는 영어 실력이 뛰어난 IT 노동자들이 주로 담당하는데, 대면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데다 업무 관련 소통은 슬랙(Slack) 같은 플랫폼에서 이뤄지므로 신분을 감출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미국 시장을 노렸다고도 했다. 미국 회사들이 월급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몇 년을 보낸 진수씨는 억압적인 근무 환경 속에서 점점 답답함이 쌓여갔다고 말했다. 그는 "외출은 절대 안 됐고 항상 실내에만 있어야 했다"며 "운동도 못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국에 살면서 북한에 있을 때보다는 서방 매체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외부 세계를 직접 보게 됐다. 진수씨는 "해외에 나와 있으면 북한 안에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된다"면서도 그런데도 자신처럼 실제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고 설명했다.

탈북 후 진수씨는 여전히 IT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가짜 신분으로 여러 기업에 중복취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수입이 줄었지만, 번 돈을 온전히 가질 수 있어서 실질 소득은 오히려 늘어났다. 그는 "예전엔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에 익숙했지만, 이제는 정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받을 자격이 있는 돈을 벌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정 기자 khj27@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