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은 불완전
극복할 방법은 실패와 다른 사람과의 만남
이정재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로 의미 생겨"
'오징어 게임' 시즌 3에서 성기훈(이정재)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게임 시스템을 붕괴시키진 못하지만, 기어코 인간의 존엄성을 시현한다. 처음부터 고결하고 강직한 사람은 아니었다. 노모에게서 훔친 돈을 도박으로 탕진했고, 딸에게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455명의 죽음에 연루되면서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다시 게임에 뛰어들어 참가자들을 만류하기 시작한다.
성기훈에게는 애초 변화할 가능성이 있었다. 자동차 회사에서 16년간 일한 성실한 노동자였다. 사측의 구조 조정에 맞서 파업에 참여하고 시위하다 해고됐다. 인생이 꼬인 원인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기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사회의 불공정함에 있었다. 잔혹한 게임에서 다시 경험한 이상 두 번째 게임은 인간다움을 되찾는 여정이어야 했다.
다수 시청자는 일련의 과정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대표적 예로 혁명에 실패한 책임을 강대호(강하늘)에게 전가하는 신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성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은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목표가 안갯속으로 사라져버려 뒤틀린 경로로 발을 딛게 한다. 자신의 이상과 신념에 따라 성장을 도모하며 자기 이해를 이룬 사람은 자신이 지닌 시각과 자아상, 인생관이 가진 한계를 인지하기도 쉽지 않다. 한 개인으로서도 어려운 일이며,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는 더 그렇다.
극복할 방법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실패다.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그에 따른 자아상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깊은 고통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옳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이상과 신념의 한계를 인식하고, 나아가 더 포괄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다.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낯선 신념을 마주하면서 인간은 자아상과 세계관을 확장한다. 비로소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으로 보는 눈을 갖게 된다. 성기훈의 경우 숨바꼭질 게임에서 아기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죽였다는 장금자의 고백을 들으면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이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프론트맨(이병헌)의 전체주의적 통치를 무너뜨리는 힘으로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전쟁과 억압도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쳐 실패로 끝났다. 어떤 통치자도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행위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를 두고 황동혁 감독과 여러 차례 논의했다는 이정재는 "성기훈이 할 수 있는 시도를 모두 해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고 밝혔다. "대본을 읽으면서 강대호를 죽이는 내용이 가장 안타까웠다.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닌데, 최악의 상황에 빠져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두 번 실수하지 않았다. 참가자들을 몰래 죽이라며 칼을 건네는 프론트맨의 제안을 뿌리치고 마지막 게임에 나섰다. 방향 없이 사는 대로 살아가지 않고, 존엄함 속에서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존엄은 내면에 확신으로 깊게 뿌리 박혀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부여하며, 그 고유의 인간됨이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드는 관념이다. 이를 확보한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나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평가나 인정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해줄 권력이나 영향력, 재산, 상징, 지위, 자리 또한 갈구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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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훈은 존엄을 되찾으며 모든 인간은 매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끝에는 독일의 뇌과학자 괴랄트 휘터가 저서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가능성이 있다. "개인의 의도와 목적, 기대와 평가, 심지어 전략과 지시의 수단으로 서로를 여기는 한, 존엄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빛을 발할 수 없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 이웃 공동체 안에서, 한 사회 안에서 서로를 한 인격으로 대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이 잠재력은 반드시 빛을 발한다. 개인의 잠재력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어진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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