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 계속고용, 연공식 임금체계 개편 기회로
제도 뒷받침 안 되면 청년채용 축소 등 부작용
"취업규칙 자율성 보장, 인센티브 등 지원 필요"
세계적 이론물리학자 이기명 전 고등과학원 부원장은 지난해 정년을 맞고 연구실을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중국 베이징의 수리과학연구소. 한국에선 정년을 맞은 이 전 부원장이 더 이상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주지 않았다. 이 전 부원장을 잘 아는 지인은 "과학원 측에 정년 이후에도 연구할 수 있는지 (이 전 부원장이) 타진한 것으로 안다"며 "아쉽게도 제도를 바꾸진 못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태양전지 권위자 박남규 성균관대 교수도 "정년이 없는 제도가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내 첫 '종신 교수'로 임명된 그는 예외적인 사례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나이 때문에 물러나는 건 산업 현장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반도체, 조선,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이끌어온 수만 명의 고령 기술자들이 정년과 함께 산업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외행을 택하기도 한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50세 이상 기술 인력은 36만명(2020년 조사 기준)에 달한다. 대부분은 퇴직 후에도 계속 일하기를 원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5년이 정년 문제를 풀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말한다. 청년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시점이 맞물리는 만큼 과거에 비해 정년연장에 대한 저항이 다소 덜해지는 데다 '저출생 고령화'로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구윤철 전 국무조정실장 저서인 '레볼루션 코리아'에 따르면 국내 2000년도 출생아는 64만명에서 2002년에는 49만5000명으로 줄었다. 2년 새 15만명이 감소한 것이다. 2000년생은 현재 만 25세로 취업시장에 나서는 연령대다. 앞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인구는 점차 줄어든다는 뜻이다. 구 전 실장은 "복합적인 노동인력 감소에 대응해 40만명대의 인력으로 줄어드는 2032년까지 정년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고령 인력을 재고용할 필요는 있지만 누구나 무작정 남기는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장은 "정년 연장을 일괄 적용하기보다 숙련도를 기준으로 실력 있는 인력을 선별해 유지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실적과 전문성에 따라 선별적으로 재고용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일부 대기업은 마스터, 촉탁직 등 제도를 통해 고경력 인력을 다시 채용하고 있는데 아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려면 실적과 역량에 기반한 선별적 재고용 체계 마련이 선행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임금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현재의 방식에서 벗어나 맡은 일의 성격이나 실제 성과에 따라 임금을 정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기업이 상황에 맞게 판단할 수 있도록 제도를 유연하게 바꾸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정년 이후 기간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임금 기준을 만들거나 고령자를 일정 기간 이상 고용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방식 또는 고령 근로자만을 위한 특별한 법을 따로 마련해 보호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고령자 고용, 기업 생산성에 기여해야=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고령자 일자리 정책이 근로자·사용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고령자 고용 촉진 내지는 연장에 관한 제도·체계 개선은 일자리를 유지하는 고령자뿐 아니라 기업의 비용 절감과 생산성 제고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고령자 고용을 둘러싼 제도 설계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65세 정년연장'을 두고 노사 간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일괄적인 법정 정년연장이 추진될 경우 호봉제 중심의 연공 임금체계를 가진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는 인건비 부담이 커지고 그 여파로 신규채용 축소나 비정규직 계약 해지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김 교수는 "숙련된 고령자가 노동시장에 남아 일을 계속하는 건 당연히 필요하지만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며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은 이미 고령 근로자가 원하는 대로 더 근무할 수 있는데, 여기에 일률적인 (법정) 정년연장까지 이뤄지면 그 혜택은 (연공식 임금체계를 가진) 대기업 노조에 집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임금체계 개편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장기근속 근로자가 정년연장 혜택과 고임금까지 챙기는 구조적 문제를 낳고, 기업의 비용 부담은 청년 일자리 위축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심화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좋은 일자리를 고령층이 유지하고 남는 자리에 청년층이 갈 수 있다는 지적도 간과할 수 없다"고 부연했다.
◆65세 연장하면 임금 총액 20% 증가, 체계 바꿔야=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년연장을 위한 선행 과제로 '임금체계 개편'을 꼽았다. 그는 "임금체계가 개편되지 않은 채 65세까지 정년이 일괄 연장되면 대기업(호봉제) 기준 생애임금 총액이 최대 20% 늘어날 것으로 분석된다"며 "저성장 시대에서 기업은 인력과 인건비 총량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지만 교수의 기업의 인건비 부담 계산식은 이렇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가 처음 입사한 직원에게 월급을 100만원 준다고 가정하면 그 직원의 월급은 매년 조금씩 올라서 60세가 될 때쯤에는 300만원 정도로 오른다고 본다. 그런데 정년이 60세에서 65세로 5년 늘어나면 그 높은 월급(300만원)을 5년 더 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면 전체 근무 기간 지급되는 월급 총액이 18~20% 정도 늘어난다.
결국 기업이 그만큼 돈을 더 써야 한다는 뜻이다. 기업들은 새로 사람을 뽑는 걸 줄이거나 인건비가 적게 드는 비정규직 고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신규채용 축소와 바게닝 파워(협상력)가 약한 비정규직 근로자의 계약 해지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기존의 취업규칙과 다른 임금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동안 고임금 체계를 직무·성과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했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실질적인 업무 기여도에 따른 보상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지 합의가 필요하고, 기업 입장에선 새로운 성과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노조와 마찰, 성과 부담 및 이직 활성화에 따른 핵심 인력의 이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요인이다.
◆취업규칙 완화·인센티브 등 필요= 현실적인 대안으로 별도의 임금체계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현재 정년인 60세까지는 기존의 취업규칙을 그대로 적용하되 그 이후 연장되는 65세까지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임금과 고용 조건을 조정할 수 있도록 정부가 유연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령자를 계속 고용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등 정책적 뒷받침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의 취업규칙은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바꾸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늘릴 경우 지금처럼 연공 중심의 임금체계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정년만 늘리는 것은 기업의 부담을 키우고 청년이나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기존 노동법과는 별도로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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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교수는 고령자에게 맞춘 임금체계와 보호 제도를 담은 특별법을 제정하면 기존 노동법의 경직성을 피하면서도 고령자 고용을 유연하게 늘릴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이 일괄적인 정년연장을 주장하는 노동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어 현실화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그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고령 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처럼 단계적 로드맵과 인센티브 제도를 통해 '사실상의 정년'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린 뒤 일정 시점에 이르러 법제화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오현길 기자 ohk041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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