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왕실모독죄
외국인에 이례적인 강경 적용
왕실모독죄 개정 시도 정당 해산
태국정부가 대학에서 강연 중인 미국인 교수를 왕실모독혐의로 체포하면서 미국 정부와 외교마찰을 빚고 있다. 외국인에게까지 왕실모독죄를 강하게 적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태국 안팎에서도 논란이 거세다. 왕실모독죄의 악용 우려에 태국 정계에서 개정 움직임이 있었지만, 오히려 개정을 추진하던 정당이 해산되면서 개정 논의 자체가 난항을 겪고 있다.
태국 대학서 강연하던 미국인 교수 체포…왕실모독죄 적용
최근 태국 나레수안 대학교의 강사로 재직 중인 미국인 폴 챔버스 교수가 왕실모독죄와 컴퓨터 범죄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이 CNN 등 미 언론을 달궜다. 그는 체포영장 발부 직후 혐의를 부인했지만 태국 경찰에 의해 체포돼 구금됐으며, 보석금 신청도 불허된 것으로 알려졌다.
챔버스 교수의 구체적 혐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챔버스 교수의 변호인단 측에서는 세미나에서 태국의 군부 및 경찰에 대한 내용을 강연하던 도중 태국 국왕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문제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챔버스 교수는 "태국 국왕이 군을 재편하거나 고위 국가안보관리를 임명할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내용이 있었는데 해당 내용이 왕실모독죄에 걸렸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일단 사태를 예의주시하겠다는 입장이다. 태미 브루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해당 사건과 관련해 태국 당국과 소통 중"이라며 "우리는 해당 문제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며 태국 당국에 챔버스 교수에 대한 접근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태국에서 왕실모독죄는 중죄에 해당한다. 형법 112조에 "국왕이나 왕비, 왕세자 등을 비방하거나 위협한 자는 죄목당 3년에서 최고 15년까지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1월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태국 군주제를 비판하는 게시물을 다수 올린 혐의로 체포된 태국 남성은 11개 게시물에 대해 각각 왕실모독죄가 적용돼 전체 징역 5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다만 외국인이 벌인 불경죄의 경우에는 해당 국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태국에서 추방시키는 조치로 대응해왔다. 2011년 태국계 미국인인 조 고든이란 인물이 현재 태국 국왕 라마10세의 선친인 라마 9세에 대한 왕실모독죄로 징역 2년6개월이 선고됐지만, 왕실 사면으로 석방된 후 추방됐다.
왕실모독죄 개정하려던 정당도 해산…"입헌군주제 훼손"
태국 정계에서는 왕실모독죄 범위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정적 제거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이유로 이를 개정하자는 움직임도 일었지만, 개정을 추진하던 정당이 오히려 해산되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의회 원내 1당이었던 전진당(MFP)이 태국 헌법재판소의 명령으로 해산된 바 있다.
전진당은 2023년 5월 총선 당시 왕실모독죄 개정 추진을 주요 공약으로 걸고 20대와 30대 젊은 유권층들의 지지에 힘입어 1당 자리에 올라섰다. 그러나 총선 이후 2024년 3월, 태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전진당의 왕실모독죄 개정 추진에 대해 "입헌군주제인 태국 민주주의 체제를 훼손한다는 증거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전진당의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했고, 그해 8월 태국 헌법재판소가 정당해산 명령을 내렸다.
지금 뜨는 뉴스
정당해산 명령과 함께 전진당의 당시 대표인 피타 림짜른랏 의원 등 지도부 11명에 대해서는 10년간 정치 활동 금지 명령까지 내려졌다. 결국 전진당 의원 중 143명이 새로 태국 국민당(PP)을 창당해 당적을 바꿨다. 정당해산 사태를 겪은 후 국민당은 왕실모독죄 개정은 점진적으로 추진해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