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하는 유럽·아시아 동맹국
美주도 세계질서 재편 움직임
자국 영향력 악화 가져올 수도
때로는 작은 사건이 세계 근간에 숨어있던 더 큰 진실을 드러낸다. 예컨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일부 동맹국이 미국산 전투기 'F-35' 구매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항공기 하나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현대 국제 질서의 중심에 존재하는 불균형한 권력 구조와 의존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창이다. 동시에 자유세계가 붕괴한다면 벌어질 구조 재편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포르투갈, 캐나다 등 일부 나토 동맹국이 F-35 전투기 구매를 재고한 배경에는 해당 기체가 적대적인 미국 대통령이 기체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장치인 '킬 스위치(kill switch)'를 탑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조사인 록히드 마틴은 이런 소문을 즉각 부인했지만, 비유적 의미에서의 '킬 스위치'는 실재한다. F-35 전투기의 운용에는 정비·무장·부품 공급·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등이 필수적이며 이 모든 과정은 워싱턴 승인 없이 이뤄질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약 10주가 지난 현재 유럽의 주요 동맹국 중 미국에 기대는 것이 유효한 선택이라고 확신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지난 2일(현지시간) 백악관이 발표한 대규모 글로벌 관세 정책은 이런 회의론을 확증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냉엄한 현실은 이른바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사실상 동맹국들의 극단적이고도 포괄적인 의존을 바탕으로 구축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미국은 더는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수의 외국 정부는 대부분의 거래가 달러로 이뤄지는 세계 경제 시스템에 의존하는 채로 자국 상품을 거대한 미국 시장에 수출해 생존을 도모한다. 나토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 이르기까지 주요 국제기구들 역시 미국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
미국은 자유세계의 정보 공조 체제의 핵심축이기도 하다. 이는 고도로 민감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교환하는 시스템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미국 동맹국들은 중량 항공 수송부터 핵무기까지 가장 중요한 군사 능력을 미국이 동맹국들을 대신 보유하고 행사하는 시스템을 장기간 수용해왔다. 오히려 이를 환영해온 측면도 있다.
이처럼 독특한 시스템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수십 개국이 번영과 안보, 나아가 생존까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 주권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흔든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형성된 제도화된 협력의 산물이자 증거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이 미국을 이용한다고 비판했지만, 이 체제는 미국이 우호적인 국가들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다. 이는 1945년 이전 세계를 여러 차례 전쟁과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무정부적 국제 질서에 대한 해답으로, 미국의 온건한 패권 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던 연유다.
그러나 이런 독특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국이 동맹국을 배신하지 않고 그들의 의존을 지속해서 무기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나토 동맹국들로부터 영토를 빼앗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일시적이지만 중단했으며, 해당 국가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사실상 미국이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 역시 유럽 국가들을 '우방'이라기보다 '적대적 존재'로 규정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국과 인접 국가들이 미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역으로 이용해 가혹한 무역전쟁을 벌이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동맹국간 갈등이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이번 양상은 과거와 다르다. 유럽과 미국 간 공동체 사이에서는 작금의 동맹 구조가 자유주의적 가치에서 벗어나 국제 질서의 '재편'을 시도하는 개정주의적 성향을 띤 초강대국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시점에서 대부분의 동맹국에게 미국을 달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응책이 없는 상황이다. 선거운동 중인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는 끝났다고 단호히 선언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사례에 가깝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트럼프가 유럽에 계속 관여하도록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유럽에서 발을 빼는 순간 우크라이나 방어는 물론 단기적으로는 유럽 대륙 전체의 방위마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일본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 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을 신뢰하지 않는 동맹국들조차 그 없이 버틸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의 침식이 계속된다면 파장은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트럼프 1기 정부 당시 유럽이 실험적으로 도전한 것과 비슷한 비(非) 달러 결제 시스템의 확산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달러 지배력이 여전히 공고한 만큼 장애물은 많지만, 유럽은 물론이고 글로벌 사우스, 권위주의 국가들까지도 달러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다.
워싱턴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면서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상호 협력을 강화하는 새로운 외교·안보 협력체가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폴란드, 루마니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나토와 별개의 소규모 연합을 구축할 수도 있다. 일본 전문가들 역시 호주, 필리핀, 인도, 한국 등과의 관계 강화가 이상적으로는 미·일 동맹을 보완하는 역할이 되길 바라지만, 현실에 가까운 시나리오는 미국을 대체하는 구조로의 전환 가능성이다.
군사 물자 공급 관계도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지 않는 나라에서 최첨단 무기를 구매하려는 국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유럽은 당장 F-35에서 발을 뺄 수는 없다. 그에 상응하는 전투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이탈리아, 영국이 차세대 전투기를 공동 개발하기로 한 최근 발표처럼 새로운 파트너십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과 유럽연합(EU)의 대응은 유럽의 군사적 자립을 촉진하고 방산 산업에도 호재로도 작용할 것이다.
더불어 핵무장이 확산된 세계가 도래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과거 미국에 의존했던 동맹국들이 이제는 ‘궁극의 무기’를 직접 보유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폴란드, 독일 등지에서는 이미 핵무장에 대한 논의가 가열되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핵우산을 유럽 전역에 적용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로 판명될 경우에는 유럽 대륙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핵억지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은 이 상황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동맹국들의 미국 의존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동맹국들이 첨단 무기 구매를 중단하면 미국 방산업체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를 개발할 자금과 일자리 모두 줄어든다. 미국의 동맹 네트워크가 붕괴해 달러 위상이 약화하면 미국의 차입 비용은 늘고 재정적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핵확산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면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 역시 희석될 것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초강대국으로서 막대한 이익을 누려왔다. 그러나 트럼프가 초래하고 있는 이 글로벌 구조 재편은 결국 자국을 약화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블룸버그 칼럼]트럼프 관세 위협, 전세계 '킬 스위치' 될 수도](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040808403410270_1744069234.jpg)
할 브랜즈 존스홉킨스 고등국제학대학원(SAIS)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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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블룸버그의 칼럼 Trump’s Threats and Tariffs Are a Global 'Kill Switch'를 아시아경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이 칼럼은 아시아경제와 블룸버그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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