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정책으로 집권 2기를 시작할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속도와 규모는 예측 이상이다".
트럼프 1기 시절 무역대표부(USTR)에서 통상 정책을 맡았던 한 참모의 말이다. 현재 워싱턴 D.C. 대형 로펌에 몸담고 있는 그는 트럼프 2기 무역 정책에 대한 최근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대화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취임 전부터 트럼프의 관세 발언을 가볍게 넘겨선 안 되며, 공약집이나 유세에서 등장한 통상 정책은 모두 실행될 것이라 경고했었다. 그랬던 그조차도 트럼프의 전방위적 관세 공격은 '온 더 레코드(공개를 전제로 한)'로 평가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했다.
트럼프발(發) 관세 전쟁이 점입가경이다. 그는 '해방의 날'이라 칭한 4월2일 모든 교역국에 상호관세 폭격을 퍼부었다. 한국에는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일본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2월 백악관을 찾아가 트럼프의 환심을 살 대규모 선물 보따리를 풀었지만, 리더십 공백 상태인 우리와 비슷한 24%의 관세를 맞았다. 관세 앞에서 트럼프에겐 동맹도 적도 없다. 중국은 34%, 대만은 비슷한 수준의 32%의 관세가 매겨졌다.
트럼프는 그동안 주식시장을 경제 정책 성과의 주요 척도로 내세웠다. 하지만 집권 2기 들어 입장을 선회했다. 관세로 인한 증시 충격에도 미국 경제 개선을 위해 단기 혼란과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연이어 발신하고 있다. 관세는 무역적자 해소뿐 아니라 제조업 부활, 세수 확충, 나아가 이민·마약 문제 해결까지 아우를 수 있는 치트키(만능 열쇠)가 됐다. 트럼프에게 관세는 이제 도구가 아닌, 신념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쯤 되니 트럼프의 의지를 그동안 과소평가한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지난해 트럼프 당선 전후로 인터뷰한 미국 측 통상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에서 한미 FTA 재개정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다고 봤다. 이는 트럼프 2기의 주요 타깃이 멕시코, 캐나다로 한미 FTA 재개정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국내 전현직 통상 관료들의 전망보다 훨씬 매파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의 무차별적인 관세 공세를 보면 미국측 전문가들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트럼프 시대엔 말 그대로 모든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다. 미국 경제계에서 손꼽히는 지한파 전문가인 태미 오버비 전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대표는 최근 기자와 만나 "트럼프의 발언을 결코 흘려들어선 안 된다"며 "미국이 희생자라 믿는 트럼프와의 무역협상에 앞서 각종 관세·비관세장벽부터 해소하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호관세 발효로 이제 협상의 시간이 왔다. 한국은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불리한 출발선에 서 있다. 트럼프와 어떤 '딜'을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관세는 미국이 쓴 협상 지렛대가 될 수도, 우리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청구서가 될 수도 있다. 무역 문제가 끝이 아니다. 관세 문제가 일단락 돼도 주한미군 주둔비용(방위비 분담금) 증액, 북핵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특히 최근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뉴클리어 파워(핵 보유국)'로 지칭한 발언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만약 그가 한국을 '패싱'하고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한다면 이는 한반도 안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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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하면서 리더십 공백은 6월 초 대선을 통해 해소될 전망이다. 늦었지만 두 달 뒤에는 대미 정상 외교가 가능해진다. 지금이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감안한 트럼프 대응 전략을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대미 아웃리치를 한층 정교화하고, 통상과 외교·안보에서 이해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전략적 연대도 병행해야 한다. '동맹'이나 '우방'이란 이름에 기대거나 낡은 협상 프레임에 안주하는 태도로는 언제나 예측을 넘어서는 트럼프 리스크를 헤쳐나가기 어렵다. 모든 것이 가능한 트럼프 시대, 가장 어두운 시나리오까지 대비하며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야 할 때다.
뉴욕(미국)=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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