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오버 더 모빌리티](10)
정통 현대차맨이 말하는 현대차
한국인 최초 ISO 회장 당선
현대차그룹 네트워크 도움받아
사명감·간절함서 나온 현대차 '추진력'
위기 극복 원동력이자 급속 성장 비결
"현대차그룹의 DNA는 분명히 있지요. 저는 그게 목표 지향적 추진력이라고 생각해요."
30년 가까이 현대차그룹에 몸담아 온 조성환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 1994년 현대차에 들어가 CNG(천연가스) 엔진 연구원을 시작으로 미국기술연구소 법인장과 연구개발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현대오트론 대표이사, 현대차 연구개발본부 부본부장, 현대모비스 대표이사까지 지낸 '정통 현대차맨'이다. 수많은 현대차·기아의 차종을 연구개발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현대차의 위기와 성장, 성공을 모두 지켜봤다. 지금은 글로벌 무대로 활동영역을 넓힌 그는 현대차그룹의 위상 변화를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다. 그가 현대차만의 DNA로 꼽은 건 바로 '추진력'이다.
조 회장은 현대차만의 추진력이 사명감과 간절함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대차그룹 직원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실패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고 또 찾는다"며 "리더를 중심으로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면 굉장히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조직"이라고 말했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반도체 공급 대란이 겹친 2021년, 모든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공장을 세웠을 때 오히려 현대차그룹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뒀다.
이 같은 비약적인 성장의 배경에는 '목적 중심의 추진력'이 있었다. 당시 현대모비스 대표를 맡았던 조 회장은 "현대차에 반도체를 공급하던 모비스가 어느 정도 적정 재고를 보유하고 있었던 데다 현대차와 모비스 구매팀 담당자들이 반도체 회사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읍소해서 받아오는 물량도 상당했다"며 "이들의 간절함 덕분에 현대차·기아 공장이 차질 없이 돌아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전 세계 시장에서 현대차·기아의 품질에 대해선 글로벌 톱티어의 위상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조 회장은 "2010년 전후로 미국에서 현대차가 급부상하면서 당시 GM, 포드 등 경쟁사 중역들이 현대차를 직접 타보고 원가·품질 분석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며 "이제 현대차는 글로벌 평가기관에서 품질이나 상품성 측면에서 글로벌 톱3에 걸맞은 점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지난 2022년 9월 한국인 최초로 ISO 회장에 당선이 가능했던 것도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아부다비에서 열린 제44차 ISO 총회에서 조 회장은 중국 후보를 두 배 이상의 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우리 정부가 끌어주고 현대차그룹이 뒤에서 밀어준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그의 당선이 오랜 기간 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한 중국의 유력 후보를 제쳤다는 점에서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글로벌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조 회장의 임기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다. 그는 "선거 운동을 하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돌았다"며 "브라질, 프랑스까지 갔다가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호텔에만 있다가 다시 돌아온 적도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1974년 설립된 ISO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비정부기구다. 사무국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고 전 세계 173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한 해 동안 만들어내는 국제 표준만 1600여 종류가 넘는다. 표준 제정의 범위는 제조와 기술 분야는 물론 기후변화와 지속가능성, 에너지, 다양성과 포용성, 건강, 식품, 건설 분야까지 광범위하다. 각 분야에 맞는 세부 표준은 기술 분과(Technical committees)에서 전문가들이 모여 정한다.
조 회장의 역할은 이 전문가들이 표준을 정하는데 필요한 큰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이다. 그는 "글로벌 표준 준수는 국가 간 교역이 가능해지고 국제무대에서 품질을 인정받는 시작점"이라며 "표준이 인류의 삶을 좀 더 쉽고, 안전하고, 낫게 만들어 준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정책적인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표준 제정 작업에 인공지능(AI) 기술을 도입하고, 국제무대에 표준의 중요성을 알리는 포럼 준비에 한창이다. 세계 3대 표준기구인 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협의체를 이뤄 올해 말 한국에서 ‘국제 AI 표준 서밋’을 개최한다.
국내에서 조 회장은 2021년부터 한국자율주행산업협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그가 쌓은 글로벌 무대에서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자율주행 산업을 위해서도 기여할 일이 분명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우리나라 자율주행 산업 발전을 위한 선제조건을 두 가지로 꼽았다. 우선 자율주행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해 '실제 주행 데이터'를 많이 확보해야 하며, 자율주행 스타트업이 수익을 낼 수 있도록 정부 주도형 생태계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그는 "아직 시장이 열리질 않아서 자율주행 스타트업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없다"며 "정부 주도형 시범 사업을 확대해 한국형 자율주행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조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현대차그룹에서 입사해 처음 어떤 역할을 맡으셨나?
▲ 대형 버스에 탑재되는 CNG 엔진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다.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교수님께서 현대차 연구직을 추천을 해주셨다. 당시 용인 마북 연구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웃음) 미국에서 공부를 잘 마쳤기에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차는 대학원 시절 프로젝트도 공동 진행을 해봤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익숙한 회사였다.
-2012년부터 미국기술연구소 법인장을 역임하며 다시 미국으로 가셨는데. 당시 미국에서 현대차의 이미지는 어땠나?
▲ 2010년부터 현대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본격 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 시장에서도 잘됐지만 미국에서도 좋은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생산 공장이나 품질을 테스트하는 미국 기술연구소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당시 한창 텔레매틱스나 인포테인먼트 관련 기능도 부각되면서 소프트웨어 사양의 미국 현지화를 담당하는 역할도 부각되던 시기였다. 현대차가 미국에서 단기간에 성장하면서 경쟁사의 견제도 상당했다. GM, 포드 등 경쟁사 임원들이 현대차의 품질을 알아보기 위해 한 달 동안 현대차를 타고 통근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볼트 너트 단위까지 분해를 해서 원가 분석도 하고…. 미국 국민 브랜드가 현대차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현대차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얘기 아닐까.
-단기간에 성장한 현대차만의 DNA는 무엇일까?
▲ 목표 지향적 추진력이다. 정해진 기한 내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방법을 또 찾고 찾는다. 그 추진력이 때로는 무모하고 상식을 벗어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간절하다는 얘기다. 간절함은 반드시 맡은 일은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명감과 간절함의 차이가 오늘날의 현대차그룹을 만들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얘기들은 평소엔 다 좋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는 출구 전략을 마련한다는 목표를 향한 집중된 추진력, 목표 달성에 대한 의지가 진가를 발휘한다. 현대차는 그런 DNA를 갖고 있다. 이 같은 현대차 문화는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한다.
-ISO 경선에도 현대차그룹의 도움이 컸다고? 선거 당시 상황이 궁금하다.
▲ 처음에는 단독 후보로 입후보해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에서 후보를 내면서 경선 체제로 돌입했다. ISO에서 중국이 상임이사국인데다 경쟁 후보도 중국 내 상당한 유력 인사였다. 그래서 선거 운동을 상당히 열심히 했다. 지구 한 바퀴 돌아서 브라질까지 갔다가 코로나에 걸려 호텔 방에만 있다가 다시 돌아온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다. 미디어 콘퍼런스를 통해 정견을 밝히고 외신과의 인터뷰도 했다. 정부에서도 많이 도와주셨지만 선거 운동 과정에서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많은 도움이 됐다.
-ISO에서 역할은?
▲ ISO에서 제가 하는 일은 표준화 기구의 거버넌스, 그러니까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셈이다. 표준은 기술산업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이끌어가는 기준이다. 제 역할은 거버넌스적인 차원에서 정책과 방향을 논의하고 이끌어 가는 역할이다. 사무국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커미티(분과)가 따로 있기에 그들이 정하는 기준의 내용을 제가 일일이 관여하지는 않는다. 대신 저는 거대 담론이나 정책 전략의 방향성을 이야기한다.
-표준이 우리 생활에 왜 중요한가?
▲ ISO 표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일단 국가 간 상거래부터가 불가능하다. 표준을 만족시키지 못한 제품은 세계 시장에 나갈 수 없고 품질이나 안전성을 담보하지도 못한다. 표준 제정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표준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유럽의 경우 표준을 토대로 법과 제도까지 만든다. 국제사회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표준부터 충족해야 한다. 세계 무대로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 주어지는 셈이다.
-지난해부터 본격 ISO 회장직을 역임하며 느낀 점은?
▲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의 표준화 활동에 대한 인식 확산이 필요하다.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다 보니 거대 담론도 이야기하지만 각국의 이익을 위한 치열한 움직임들이 눈에 보인다. 우리나라도 표준화 활동이 좀 더 주목받고 중요성을 인식했으면 한다. 최근 중국 조어대에서 중국의 무역 관련 장관급 인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ISO 회장인 저보다도 표준에 대한 지식이 더 해박했다. 표준을 통해 무역 이슈를 어떻게 해결하고 경제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뚜렷한 신념과 목표를 갖고 있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난 다음에도 글로벌 무대에서 적극 활동하는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국내에서 한국자율주행산업협회 회장직도 맡고 계신데, 우리나라 자율주행 업계의 문제는 무엇인가?
▲ 우리나라 자율주행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기술과 규제, 시장이 받쳐줘야 한다. 그리고 이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많은 차를 주행해 보는 것이다. 리얼 데이터의 수집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규제로 정해진 것만 하라는 식의 ‘포지티브 규제’다 보니 데이터 수집이 원활하지 못하다. 자율주행 특구가 전국 곳곳에 지정됐지만 지역의 범위도 작고 여러 제한조건을 걸어놨다. 주행 차량의 규모도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기술은 어느 정도 개발이 됐는데 시장이 열리질 않는다. 기업들이 돈 벌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이야기다. 하다못해 시범사업을 통해 수익원을 확보해야 다음 기술 개발을 이어갈 수 있는데 상업화 허가 등 측면에서 활성화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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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정부 주도의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상품화 가능한 하나의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소프트웨어는 누가 해라, 하드웨어는 누가 맡아라 이런 식으로 수평적 구조에서 협업이 필요하다. 자율주행차는 기존 완성차의 수직계열화 협력사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협력사들이 각자의 몫을 가지고 하나의 상품화된 자율주행 프로젝트를 수평적 구조에서 협업해야 한다. 정부가 플랫폼의 판을 깔아주면 이곳에 투자하는 기업들도 생겨나지 않겠나. 이 같은 생각의 연장선에서 자율주행 상업화 측면에서 산학연 협업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기초 기술 개발도 물론 중요하지만 글로벌 경쟁 상황을 고려하면 이제는 결과물(제품)이 나와야 할 시기라고 본다.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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