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자립수당 9조4000억 삭감
경기침체·방위력 증강에 고육지책
영국 노동당 정권이 복지 수당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 돈으로 9조4000억원 정도를 삭감한다는 내용이다. 세계적인 진보 정당으로 꼽히는 영국 노동당에서 복지 예산을 이 정도 삭감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영국 내부에서도 논란이 크다. 노동당 내부에서도 "너무 오른쪽으로 가는 것 아니냐", "우파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에 노동당 정부가 대규모 삭감을 발표한 수당은 '개인자립수당'이라고 불리는 복지 수당이다. 이 제도는 주로 10대에서 20대 청년들 중 고아였거나 저소득층 가정 출신,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스스로 자립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매주 최대 184파운드(약 34만원)를 지원해 주는 제도다. 한달치로 계산하면 약 128만원 정도를 지급하는 셈이다.
이 금액은 적지 않은 액수로, 많은 청년들이 신청하기 시작했다. 현재 영국 내 노동 가능 인구 연령의 10% 정도인 360여만명이 이 수당을 받고 있다. 지급 규정이 까다롭지 않다 보니 실제로는 저소득층 청년이 아닌 청년들까지도 부정 수급을 한다는 논란이 계속 있어왔다. 특히 이 돈을 받고 있는 청년들은 의식주가 해결되다 보니 구직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를 비롯한 노동당 내부에서도 "수백만명이 일을 하려는 의지조차 갖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며 "이는 오히려 도덕적으로 사람들을 파산시키고 있다. 복지병을 치유시켜야 한다"며 비판이 제기됐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당 자체를 삭감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많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를 추진하는 정당이 노동당이라는 점이다.
이 제도는 원래 영국의 보수당 등 우파 정당들이 계속해서 혁파를 주장해 왔고, 노동당은 이를 막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이를 혁파하겠다고 하니 당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너무 지나친 우향우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노동당의 이러한 결정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방위력 증강이라는 새로운 숙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 정도인 방위비를 2030년까지 2.5%, 2035년까지 3%까지 늘리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이는 지금보다 거의 50% 이상 방위비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다.
영국은 재래식 전력뿐만 아니라 핵무기 비축량도 늘리겠다고 밝혔으며, 핵추진 잠수함도 새로 건조하겠다는 방위 증강 계획을 세웠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휴전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해도 러시아의 침략 위협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자체 방위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결과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영국의 경기 침체가 오래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증세를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할 수 없이 급하지 않은 예산들부터 정리해 방위비 증강에 쓰자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독일처럼 경제가 튼튼한 국가라면 정부가 대대적으로 적자 예산을 편성하거나 채권을 발행해 방위 예산을 추가할 수 있지만, 현재 영국 경제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경우 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래서 우선 논란이 많았던 개인 자립 수당을 대폭 삭감해 그 재원으로 방위비를 충당하려는 것이다.그러나 민생고가 극심한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만도 많고,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에너지 및 공공요금이 10배 가까이 오른 상황에서 복지 축소 정책을 펴다 보니 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이 제도 자체는 노동당이 2007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만들기 시작해 2013년에 어렵게 통과시킨 정책이다. 지금 와서 노동당이 스스로 이 정책을 뒤엎는 것에 대한 비판도 크다. 수당 삭감의 주된 명분은 일할 청년들이 일을 안 하니 일자리로 유도하자는 것이지만, 영국의 실업률은 지난해 말 기준 4.4%로 한국의 2.7%에 비해 상당히 높은 상황이다. 청년들이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상황에서 수당을 삭감하면 저소득층 청년들과 장애를 가진 청년들의 생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전통적인 지지층의 이탈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정권이 불안해질 수도 있다는 걱정도 나온다. 그럼에도 영국과 유럽의 안보 환경이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여론도 상당히 크다.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에서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기 침체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까지 이어지면서 안보 불안이 가중되어 정당의 정체성을 넘어 전체적으로 사회가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유럽에서는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냉전이 끝난 이후 '복지 천국'이라 불리며 복지 정책을 많이 펴왔지만, 지금은 유럽 대부분 국가가 복지 정책을 대폭 삭감하고 군비 증강으로 돌아서고 있다. 과거에는 군비를 대폭 줄이면서 복지를 늘렸다면, 지금은 복지를 줄이면서 군비를 증강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조가 계속되면 현재 집권하고 있는 중도 보수나 중도 좌파 정당들을 넘어 극우 정당들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프랑스, 독일, 영국 3국 모두에서 최근 있었던 총선에서 극우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이전에는 소수 정파였던 이들 정당이 이제는 원내 2당으로 올라서는 등 수권 정당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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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군사적 긴장감이 더 커지고 군비 경쟁이 계속 촉발되면 극우정당이 집권할 가능성도 있다. 유럽은 극우 정당이 집권했던 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의 안보는 유럽이 알아서 책임져라"고 선언한 이후,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군비를 확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것이지만, 유럽 국가들 간의 군비 경쟁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과거 역사를 볼 때, 세계가 불확실성의 군비 경쟁으로 향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이미리 PD eemilll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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