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릴레마에 갇힌 데이터센터(2)
시청 앞에서 주민 집회…반대 목소리
고양시청 "정부가 세부 기준 마련을"
디지털 시대 필수 인프라인 데이터센터가 인공지능(AI) 대전환과 주민 반대, 전력 수급이라는 3가지 문제에 봉착하며 일명 '트릴레마'에 빠졌다.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데이터센터의 역할은 커졌는데 수도권 내 전력 공급은 어려워지고 '유해 시설'로 인식한 주민들의 반대 목소리는 높아진 것이다.
지난달 11일 경기 고양시청 앞. 식사동 위시티 일산자이2단지 입주자대표 회장을 맡고 있는 김용호씨는 이날 아시아경제와 만난 자리에서 "주민들의 건강권과 재산권은 누가 보장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 표현에 따르면 고양시는 ‘데이터센터의 성지’라고 불릴 정도로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그가 고양시청 앞에서 열린 주민 집회에 참석한 건 식사동과 문봉동 데이터센터 건립을 막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데이터센터가 ‘미래 먹거리’라고 들었다. 필수 산업이라고 하니 못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아파트 단지에서 고작 50m 떨어진 곳에 짓는 건 너무하지 않나"라며 "생활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투쟁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데이터센터가 365일 24시간 전력을 사용하고 154킬로볼트(㎸)의 초고압 전력망을 필요로 하는 만큼 전자파 문제, 전파장애, 냉각기 회전으로 인한 야간 소음과 열섬 문제가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면 집주인들의 재산권 피해도 클 것"이라고 토로했다.
고양시 문봉동에는 요양시설 7곳이 모여있는 요양타운과 대형 교회 인근에 데이터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다. 지하 3층, 지상 4층 규모로 총 연면적 4만8900㎡(약 1만4800평), 건축면적 1만㎡(3000평) 규모다. 시행사는 신영에스앤디(S&D)에서 이 사업을 위해 출자한 특수목적법인인 신영문봉PFV다. 지난해 3월부터 인허가 절차에 착수해 지난달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주민들 반발에 부딪혀 건축 허가가 지연되고 있다. 문봉동 데이터센터 부지를 가보니 ‘문봉요양타운’ 안에 있는 정안요양병원과 일산순복음영산교회 사이에 있었다. 공사를 하기 위해 넓게 터를 조성해놨지만 삽을 뜨진 못한 상태였다.
문봉동 데이터센터 안건을 심의할 고양시 제3차 도시계획위원회는 시위 다음날(2월12일) 열렸다. 도시계획위는 건축 등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행위를 할 때 민간 전문가를 중심으로 심의한다. 앞서 1, 2차 회의에 이어 이날도 전원 일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표결에 부쳐졌고 교수, 전문가 등 도시계획 분야 외부위원들이 데이터센터 설립 찬성에 대다수 손을 들어주면서 15대2로 조건부 가결됐다.
김은희 정안요양병원 이사장은 "주민 의견을 대변해줄 위원을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요양병원 환자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는 데이터센터가 주민들의 눈을 피해 마치 007 비밀 작전하듯 설립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건강 상태가 취약한 노인들이 주로 밀집해있어 저주파 소음과 전자파 노출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양시는 앞서 김씨 표현대로 ‘데이터센터의 성지’다. 서울과 가깝고 교통 요건이 좋아 데이터센터에 적합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수년 전부터 사업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지역이다. 이미 운영 중인 데이터센터가 2곳, 건축 허가를 받았거나 받을 계획으로 건립을 추진 중인 데이터센터는 6곳이다. 문봉동과 식사동 외에 덕이동에선 GS건설 계열사인 마그나PFV가 데이터센터 건설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마그나PFV는 착공 신고를 반려한 고양시를 상대로 행정심판을 청구했고, 경기도 행정심판위원회는 사업자의 손을 들어줬다. 사리현동과 향동동에도 데이터센터가 건축 허가를 받았지만 주민들이 반대하면서 공사가 지지부진한 상태다. 특히 사리현동 데이터센터의 경우 초등학교와 불과 35m 떨어진 곳에 있어 생활환경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주민들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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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는 데이터센터를 놓고 사업자와 주민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새다. 사업자가 소음, 전자파를 기준치 이하로 저감하는 대책을 마련하고 다른 규정들도 지킨다면 민원만으로 데이터센터를 건립을 막을 만한 법·제도적 근거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신철상 고양시청 대변인은 "관내 데이터센터 건립 과정에서 주민들이 피해를 입거나 불편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라고 입장을 전해왔다. 이어 "데이터센터는 비단 고양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지자체가 비슷하게 겪고 있는 문제"라며 "하루빨리 정부에서 데이터센터 관련해 입지와 건립 조건 등 세부적인 기준을 마련해 갈등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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