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이광호 문학평론가 겸 문학과지성 대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단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가 앞으로 무엇을 고민하고 이를 통해 어디에 다다라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하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한강 효과'라는 것은 그 고귀한 성취의 이면에 각인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담론의 주제를 더 가시적으로 영글게 하라는 메시지와도 같다. 가뜩이나 AI가 예술창작의 거의 모든 분야에 침투하기 시작한 지금, 이같은 메시지를 받아든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문학과지성 대표는 인간 고유의 가치와 창조의 의미에 주목한다.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해 우리 문학이 세계의 중심에 진입하는 장면을 지켜본 이 대표를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문학과지성 사옥에서 만났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한강 작가가 수상하는 모습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이번 경험은 저와 한국 문학 모두에게 첫 경험이었어요. 특별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의 중심에 서는 첫 자리에 제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뜻깊었습니다. 물론 처음이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낯설음 속에 따라오는 긴장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은 일종의 통과의례 같아요. 무엇이든 처음이 주는 긴장감을 넘어서고 나면 사실 그렇게 어렵고 대단한 일만은 아니구나, 또는 한국 문학도 할 만 하구나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단순히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이 글로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여에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가 어떤 발걸음을 내디딜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러한 일이 한두 번의 성과로 끝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문학적 지평의 확대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문학 지평 확대로 이어지길"
-시상식에서 한강 작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그리고 이 성취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한강 작가에 대한 현장의 관심과 열기가 대단했어요. 아마 한강 작가 본인이 가장 힘들었을 듯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내색 없이 굉장히 차분하게 수상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문학은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기에 국위선양의 맥락을 대입하는 건 문학적 담론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상황과 연관지어 바라볼 수는 있겠죠. 적어도 한국어 문학이라는 것은 여전히 소수의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작은 시장이고 따라서 독자의 수 또한 적기 때문에 언제나 번역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과제가 도사리고 있어요. 또한 국제적 문학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낮은 게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문학이 국가를 대표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국어 문학이라는 관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는 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수상이 주는 상징성은 큽니다. 노벨문학상의 오랜 역사 속에서 아시아 여성 작가가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 작가가 "노벨상은 남성을 위한 제도이며 현대화해야 한다"고 했을 만큼 보수적 성격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한국어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과 함께 아시아 여성 언어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또한 한국어 문학이 지닌 독창성과 깊이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계기로, 다른 한국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긴 것도 맞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문학의 미래는 어떨까요. 그리고 '한강 효과'는 지속될까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 문학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멘텀을 유지하려면, 한 명의 스타 작가를 넘어 다양한 목소리가 함께 들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한국 문학은 시장의 규모가 워낙 작기 때문에 언제나 양극화라는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다양성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얘기예요. 시장이 크다면, 독특한 작품을 쓰는 작가도 책이 만 부 정도 팔리는 걸 전제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독특하고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글을 쓰는 작가가 그런 안정적 글쓰기 환경을 갖기가 어렵죠.
"한국 문학 다양성 확보의 계기"
한강 작가의 작품 또한 아주 대중적인 편은 아닙니다. 한국 문학의 주류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었어요. 이번 수상은 이 같은 환경을 극복하고 한국 문학이 다양성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문학은 항상 아름다워야하고 위로를 줘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한강 작가의 작품은 단순히 아름답고 위로를 주는 방식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의 감각을 바꿀수 있게 하면서 ‘이런 것도 문학이구나’라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문학적 취향의 스펙스럼을 넓혀줍니다.
최근 통계를 보면 소설 등 문학을 접하지 않았던 중년 남성 독자들이 이번 수상을 계기로 문학 서적을 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해요.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독자들이 '이런 문학도 있구나'라고 느끼는 동시에 다른 작가의 좋은 작품을 찾아서 더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된다면 '한강 효과'가 일회적 이벤트가 아닌, 다양성이 더 커지는 쪽으로 문학 생태계가 선순환되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AI가 텍스트를 생성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런 현실이 문학, 나아가 인간의 창의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더 나아가, AI가 한강 작가처럼 글을 쓸 수도 있을까요.
▲저 또한 정말 궁금합니다. 지금의 충격은 인터넷의 세계가 열렸을 때보다 더 큰 거 같아요. 변화의 속도도 훨씬 높다는 생각이 들고요. 왜냐하면, 이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했던 경험은 검색이라고 하는 정보 취득의 광범위함이었죠. 그런데 생성형AI는 말 그대로 정보의 생성에 관련된 것입니다. 유가 유를 만드는 단순한 기술적 혁신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인간 창의성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예요.
이는 창작의 과정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전혀 다른 차원이 열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AI의 생성이라는 것은 배척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창작 행위 또는 창조 행위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깊고 치열한 질문을 해야 되는 상황에 봉착했다고 봐요.
"인간의 고유한 창작행위가 대체 뭔지 질문해야"
그러나 저는 본질적으로 AI가 생성해내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죠. 저희 출판사에서 시집이 600호가 넘게 나왔어요. AI가 이 모든 시집을 학습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AI는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그럴듯하고 멋진 시를 쓸 수도 있을 거예요. AI의 창의성과 인간의 창의성 간의 차이가 아주 얇은 종이 한 장 정도밖에 안 될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때로는 인간이 AI보다 덜 세련된 작품을 쓸지도 모르겠고요.
그런데 우리가 '최고의 예술'이라고 하는 데는, 그 얇은 종이 한 장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나아감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그저 학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예요. 학습의 차원을 넘어서는,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차원일 수도 있고 신체적인 차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에너지가 담겨야 해요. 육체를 통해 영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에너지까지도 과연 AI가 창조해 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에요. 차이가 아주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주 작은 차이는 틀림없이 남아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은 하는 거죠. 이 작은 차이를 어떤 사람은 모를 수도 있지만 비평이나 평론의 영역에서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힘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죠. 인간이 문학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과, AI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요.
▲AI는 신체로 학습하지 않고 정보를 학습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사실은 AI만큼의 정보력이 없기 때문에 신체로 학습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신체로 학습한 사람의 창의적인 언어와, 실체는 없지만 매우 광범위한 정보를 학습한 AI의 창의성은 다르다는 거죠. 이를테면 AI가 한강 작가의 문학을 학습했다면 한강 작가 수준의 묘사는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한 번도 세상에 언어로 발설된 적 없는 감각이라는 게 있어요. 피부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든가 날씨에 대한 어떤 감정이 든다든가 하는.
물론 보편적인 감각 중 하나이지만 그래도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미세한 결에 대한 다른 언어가 탄생할 수 있거든요. 신체를 가진 인간이 자신의 감각을 세상에 없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적 능력인데, 신체가 없는 AI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란 어려워요.
그리고 당연히 독자도 신체를 가졌기 때문에 그 독자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AI가 그 정보를 학습하는 것과 같은 결이라고 보기도 어렵죠. AI는 종이책의 물성에 대해 손가락의 감촉으로 경험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커피를 마시다가 조금 흘리거나 침이 떨어지거나 했을 때 그 감각을 경험할 리가 없는 거잖아요. 저는 AI가 썼다는 점을 밝히지 않아도 독자들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있어요. 다만 큰 차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AI에 대한 약간의 역설적인 자부심인 거죠.
-알고리즘 기반 숏폼 콘텐츠가 대세인 시대에, 책이 오히려 문화적 상징물로 소비되는 ‘텍스트 힙’ 현상은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본인이 선택했다기보다는 '제공되는' 영상을 소비하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텍스트 힙' 현상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흥미로운 문화적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책을 단순한 읽을거리보다는 일종의 패션 아이템처럼 여기는 모습에 허영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허영이면 어떻느냐는 입장이에요. 허영심으로 책을 들고 다니는 행위가 언젠가는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책이 주는 물리적인 경험, 예를 들어 책을 넘길 때의 감촉이나 종이의 질감은 디지털 콘텐츠로는 대체할 수 없는 사유와 상상력의 과정을 경험하게 해주죠. 비록 출발은 허영심에서 비롯될지라도 '텍스트 힙'이 단기적인 유행을 넘어, 독서 문화를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문학적 글쓰기, 나를 찾는 게 아니라 깨는 과정"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과정이 대체 뭐냐고 하면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있죠. 저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문학적 글쓰기나 책 읽기의 경험은 자기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가 깨지는 경험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낯설게 되는 거죠. 우리나라 문화는 자기 안에 있는 타자의 발견, 그리고 자기가 타자가 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가 됩니다.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이 깨지는 경험,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생각들이 파괴되는 과정이 흥미로운 경험인데 알고리즘의 세계의 경우 내가 어딘가에 관심을 가져서 한 번 클릭을 하면 계속 그에 관한 것이 따라오잖아요.
이건 어떻게 보면 우리가 비싼 돈 주고 해외 여행 가서 계속 한국 식당을 찾아가는 거랑 비슷한 맥락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확장성이나 자기가 깨지는 경험은 알고리즘은 절대로 하기 힘든 것이죠. 그러니까 예술이나 문학이 우리한테 주는 핵심적인 가치는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이 체계를 무너뜨리는 임팩트와 예술을 보며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에 있어요. 따라서 자신이 타자를 맞이하거나 혹은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행위가 예술이나 문학을 접하는 행위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AI 시대에도 버틸 수 있는 문학의 힘, 문학의 형태는 무엇일까요.
▲지금과 같은 문학의 형태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이 절멸할 것 같지는 않아요. 이를테면 종이책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고, 개개인의 고유한 어떤 영역 또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방식은 상당히 많이 바뀔 것이고 책의 창작과 편집의 과정에서 AI의 역할이 80~90%까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차별성, 즉 신체를 가졌기 때문에 발현되는 창의성이 있잖아요.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 아프고 상처받는 데 대한 두려움, 신체를 통해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죽음이라는 걸 의식하는 이 미묘한 감각적 사고를 AI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신체는 유한하잖아요. 자신의 몸이 유한하다는 걸 아는 사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는 사람.
"늙고 아프고 상처받고 죽는 데 대한 두려움, AI는 가질 수 없어"
이처럼 저는 죽음과 문학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이라는 것을 마주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체를 갖고 결국은 죽을 존재라고 생각하는, 유한성을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창의성은 남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앞으로는 AI를 활용해서 어떻게 창작할 수 있느냐 하는 교육 방식과 과정 같은 게 생길 거라고 봐요. 지금도 프롬프터의 중요성은 많이들 이야기하잖아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아니라 AI가 가진 거대한 정보와 대화를 하는 거죠. 얼마나 정교하게 질문을 해서 생성AI가 자신의 정보력을 온전히 활용하게 만드는가 하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한 개인의 지식 능력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의 능력에 이 같은 점도 포함되겠죠. 어떻게 잘 활용해서 내가 갖고 있지 못한 정보력을 뽑아낼 것인가. AI를 200% 활성화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교육이나 학습은 갈수록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문학 교육에도 이런 방식이 도입될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를 가진 인간만이, 신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이뤄낼 수 있는 창의성에 대한 교육의 영역이 조금은 남아 있으면 좋겠어요.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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