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넘은 노후산단 '렉섬'
기업 떠나가자 녹지 대대적 조성
친환경·첨단 기업들이 돌아왔다
찰스3세가 공장 개소식 참여키도
부지 교도소에는 20㏊ 공원
"산단 녹지, 안 만들 이유가 없다"
“여우가 먹이활동을 잘하고 있었네요.”
영국 웨일스 렉섬 산업단지에서 환경부문을 총괄하는 아드리안 로이드 존스씨는 여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우의 흔적은 무성하게 뒤덮인 수풀을 10분가량 헤집고 나가던 중 발견했다. 이미 신발은 진흙더미로 뒤덮였고, 바지 밑단은 도깨비바늘로 덕지덕지 달라붙은 뒤였다. 숲길에는 조류의 것으로 보이는 깃털과 뼛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일대에서 유일하게 새 사냥이 가능한,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 여우가 막 식사를 끝마친 흔적이었다. 지난달 14일 아시아경제가 방문한 렉섬 산단에서는 울창한 산림지대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웨일스에서도 북동쪽에 위치한 렉섬 산단은 크기만 550㏊로 유럽에서 가장 큰 부지를 확보하고 있다. 세계적인 시리얼 회사 켈로그를 포함해 340여개 기업이 입주해있는데 지역에서 1만명이 넘는 고용을 책임진다. 역사가 90년가량 된 노후 산단이지만 현재도 민간부문에서 1억3000만파운드(약 2300억원)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향후 4년간 창출될 투자 일자리는 1500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야생동물 1000여종 사는 '가장 친환경적인' 산단
렉섬 산단은 가장 친환경적인 산업부지로도 알려져 있다. 전체 부지의 약 40%가 녹지로 꾸며져 있다. 녹지는 인공 구조물이 없는 5개의 야생녹지와 편의시설 및 산책로가 조성된 9개의 인공녹지, 기업별로 가꾸는 수십 개의 소규모 녹지들로 구성됐다. 녹지에는 여우뿐 아니라 개체 수가 적은 황조롱이나 수달 등 1000종이 넘는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도마뱀 ‘영원’도 렉섬 산단에 자리를 틀었다.
이날 둘러본 렉섬 산단의 녹지는 부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여우 서식지는 산단 북동쪽에 위치한 일본계 렌즈회사 ‘호야(Hoya)’ 옆에 있었다. 일부 부지는 현재도 호야의 사유지다. 과거에는 야외축구장으로 기업 축구팀의 연습구장으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흔적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야생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흑단나무 산림은 통신회사와 인력회사 사이에, 자연보호습지는 산단 내 초등학교 바로 옆, 올빼미와 토끼의 통로로 쓰이는 오솔길은 트랙터 회사에서 출발하는 식이다.
처음부터 렉섬 산단이 친환경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렉섬 산단은 세계 2차대전 당시 군수품 공장을 시작으로 조성됐다. 전쟁이 끝나고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1950년 지역 기업들이 빈 땅에 공장을 지었고, 1960년부터 정부의 보조금 지원까지 제공되자 점차 기업이 늘어났다.
90년 노후산단, 녹지 만드니 친환경 기업 돌아왔다
문제는 영국의 대형도시와 떨어진 탓에 기업들의 입주 매력도가 떨어졌다는 점이다. 2010년대 초반 산단을 이탈하는 사례까지 생겨나자 지방자치단체는 산단을 친환경 장소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기업과 근로자의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친환경 기업까지 유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2014년부터 민간 환경단체인 ‘북웨일즈야생신탁’과 협약을 맺고 산단 안에서 자연환경을 가꾸고 야생동물을 관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환경규제가 늘어나 기업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기업 이탈이 줄고 친환경을 표방하는 기업들이 들어왔다. 2015년에는 유럽의 유명 친환경 제빵회사 ‘빌리지 베이커리’가 입주했다. 입주 장소로는 400년간 방치 중이던 산림 바로 옆을 골랐다. 사측은 직접 녹지를 가꾸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현재는 자연보존 캠페인과 기업 탐방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기업과 산단의 자발적인 노력에 당시 찰스3세 당시 웨일스 왕자와 카밀라 콘월 공작부인이 공장 개소식에 참여했고, 친환경 산단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산단 안에 있는 정부·공공시설도 친환경 노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017년 산단에 조성된 영국 최대 규모의 교정시설인 베르윈 교도소가 대표적이다. 애초 베르윈 교도소 야외에는 죄수들의 작업 활용공간을 만들 계획이었지만, 환경단체와의 협의 끝에 영국은 20㏊의 자연보호공간을 조성하기로 했다. 7개의 연못을 포함한 산림은 현재 일반 방문객의 발길이 차단된 채 야생동물의 서식지로 자리 잡았다.
교도소 철창 옆에도 20㏊ 녹지…"안 만들 이유가 없다"
산단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들어간 베르윈 교도소 자연보호구역은 3m에 달하는 담벼락과 철조망이 아니면 산단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야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연못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20여분. 가파른 진흙길을 오르내리자 가로세로 폭이 30여m에 달하는 연못이 나타났다. 주로 도롱뇽이 짝짓기를 하거나 겨울잠을 자는 공간이다.
산단 관계자에게 환경도 좋지만 다른 복지시설을 짓거나 기업을 더 유치하는 게 좋지 않냐고 묻자 “녹지가 최고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정책”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존스 환경총괄은 “산단의 녹지 조성은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직원 복지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면서 “녹지공간이 많을수록 지역주민의 우울증과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연구까지 있으니 안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영국은 산단 녹지정책을 더 빨리 실천하지 않아 후회하곤 한다”며 “한국 정부에 당장 친환경 산단 정책을 실천하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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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웨일스=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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