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영 대표 “생명 구하는 최고 제품 제작”
화재 피난기구 연구·개발 16년째 진행 중
전국 아파트·오피스 현장 줄지어 ‘러브콜’
프레스(압축) 가공으로 기계부품을 만드는 일을 해왔던 그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일본에 갔다 왔던 한 소방관이 ‘피난사다리’ 사업 아이템을 슬쩍 그에게 건넸다.
알고 지내던 소방관이 2009년 일본 시찰에서 보고 온 피난기구의 쓰임새를 귀띔하자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워낙 지진에 민감한 일본에서 재난대피 시스템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의 촉은 화재 시 긴급대피 피난기구를 개발하는 데 꼽혔다. 전국에 즐비하게 들어설 고층 아파트와 건물이 다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등 고층 구조물에 화재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피난기구 관련 법 시행령과 고시 등도 2010년 쏟아져 나오면서 신규 사업으로 하향식 피난사다리 프로젝트를 결심했다. 그 후 15년이 지났다. 그의 기업은 국내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치 성장했다.
“피난사다리 사업을 위해 생산라인을 한 개 더 꾸려 연구와 개발을 거듭했지요. 일본 제품에서 힌트를 얻긴 했지만 사다리를 내리는 속도와 기울어짐을 막는 독자적인 연구에 많은 시간을 썼지요.”
에스제이(SJ)테크윈㈜ 허기영 대표이사가 그동안 직접 개발한 제품들에 쏟은 땀과 열정을 묵직하게 쏟아냈다.
예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을 곱씹자면 베란다 벽을 뚫어 옆집으로 대피하는 탈출구 시설이나 방화문을 열고 들어가 피신하는 좁다란 대피공간이 화재로부터 오로지 생명을 지키는 장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거주자가 공간을 활용하느라 베란다에 온갖 짐을 갖다 놓거나 심지어 장롱을 탈출구 쪽에 으레 붙여놓고 사용하는 일이 많았으니 정작 피난 기능은 허투였다. 더구나 요즘처럼 타워형으로 우뚝 솟은 아파트의 경우 탈출할 옆집 공간을 확보하긴 불가능이다. 방화문으로 지키는 대피공간도 문과 벽체 등 일종의 방과 같은 구조물로 지어져야 하니 건축비용도 만만찮다. 채 몇십만원의 장비와 설치비로 건축 및 소방법에 따른 하향식 피난기구를 갖출 수 있다면 건설사의 선택은 명확해진다.
허 대표는 “화재가 발생할 경우 불은 위로 향하니 피난 방향은 아래여야 한다”며, “아파트와 오피스 건물 등의 베란다나 피난공간에 피난사다리를 설치하는 게 요즘 건축에서 대세”라고 설명했다.
허기영 대표이사는 “인허가 관청도 피난기구로 사다리를 권고하는 추세여서 앞으로 짓는 모든 고층 건물의 집이나 사무실마다 하향식 피난사다리를 설치해야 한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는 화재가 발생할 경우 윗집 베란다 등에서 아래로 급히 펼쳐지는 사다리로 인해 혹 아래층 사람이 다치는 피해를 막기 위해 감속 장치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피난의 시점인 위층 바닥에서 아래층 바닥에 사다리가 닿기까지 대개 3.1~3.4m 높이다. 접이식이나 슬라이드식 기구가 내려질 때 사다리 마디마다 일종의 브레이크 장치를 고안해 한꺼번에 기구가 바닥 쪽으로 낙하하는 것을 막는 데 집중했다. 또 아래로 펼쳐진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때 허공에 떠 있는 사다리가 사람의 무게 때문에 심하게 기울어지지 않도록 개발하는 것도 숙제였다.
SJ테크윈은 피난사다리 업계에서 유일하게 알루미늄 사다리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고 장기간 부식하지 않는 품질을 자랑한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평소에는 접혀있는 사다리를 보관하는 수납함도 허 대표의 장기인 프레스 금형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자체 생산돼 판매에서도 원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 피난사다리에 눈뜬 이 기업인이 연구개발을 거듭한 끝에 2015년부터 납품하기 시작했고 지금 판매 수량에선 국내 기업 중 1위를 거머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대형 건설사들의 ‘러브콜’도 이어지고 있다고 회사 측은 소개했다.
처음 판매하기 시작할 때 한달에 5~6개가량 납품했던 초라한 성적표가 지금은 매월 평균 5000여개, 연간 6만여개를 납품할 규모로 성장했다. 경남 김해시 서김해산업단지의 본사 공장에서 생산만 따라간다면 매출은 더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해 SJ테크윈은 주력이었던 금형사업 부문의 연매출이 50여억원이었고 피난사다리로 일으킨 매출은 130여억원이었으니 이 기업의 메인 아이템이 역전된 셈이다.
허 대표이사는 “바닥의 수납함에 묻혀 있는 자주 써서는 안되는(?) 제품을 만드는 일”이라며 “평생 한번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제라도 생명을 구하는 데 불량이 있어선 안될 베스트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힘줬다.
허 대표가 이끄는 SJ테크윈의 인력 구조에는 눈길 가는 점이 있다. 총 60여명이 일하는 이 기업은 2개 사업부문에 각 30여명이 일하고 있다. 피난사다리 사업부문 30여명 가운데 외국인 근로자 등 생산직 20여명을 빼면 마케팅 영업과 관리직 5~6명은 모두 한 스포츠 종목의 동호인들이다.
운동하다 만난 인연들이 이 기업에 취업한 셈이다. 사업이 운동도 아닌 데 무슨 일일까?
“족구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하니까 그렇죠!”
김문철 상무가 그 까닭을 풀이해주면서 크게 웃었다. 김 상무는 다른 공조시스템 분야 사업을 해오다 ‘초심회’라는 족구 동호인 클럽에서 만난 허기영 대표의 스카우트 대상이 돼 10여년 전 하던 일을 다 접고 SJ테크윈에 합류했다. 또 다른 족구 멤버 4~5명도 속속 허 대표의 ‘사냥감’으로 지목되거나 “족구 잘한다”는 추천을 받아 채용됐다.
피난사다리 시공을 맡은 협력업체의 박삼철 대표도 초심회 족구클럽 출신이다. 전국을 다니며 중대형 공동주택 건설현장에서 피난기구 시공 일을 도맡고 있다. 대개 건설 일은 토·일요일에도 진행되는 현장이 많은 편이지만 피난사다리 팀은 ‘셧다운’이다. 주말에는 족구를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현재 부산시족구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젊은 족구 ‘신성’들도 일손이 부족한 현장이 생기면 채용은 ‘떼놓은 당상’ 격이다. 제각각 스포츠 클럽에 활동하면서 보여준 성실한 태도와 운동으로 쌓은 ‘피지컬’이 취업에도 한몫 우대받은 것이다.
허기영 대표이사는 자신이 납품한 피난사다리가 실제로 펼쳐지는 시간이 오지 않길 바라는 역설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다. 다만 단 한번의 위기에 맞서 생명을 즉각 구할 ‘베스트’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영남취재본부 김용우 기자 kimpro77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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