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옥 전 경정 "위기는 항상 선물을 숨겨놓는 법"
"여자라는 것 인식할 필요 없어…오롯이 책임감에 집중"
은퇴 뒤 제주도 내려가 책방 열고 예술가 어시스턴트로 새로운 삶
"여자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없었고, 오롯이 책임감에 집중해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습니다."
탈옥수 신창원,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등 세간을 뒤흔든 굵직한 사건을 맡았던 박미옥 전 경정은 강력반장이 된 최초의 여성이다. 그는 유명 드라마 ‘시그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19살에 순경으로 시작한 그는 9년 만에 경위까지 초고속 승진할 정도로 경찰들 사이에서 ‘레전드’로 불리는 인물이다. 1991년 여자 형사기동대가 창설되면서 최초 여성 강력계 형사가 됐고, 이후 경감으로 승진하면서 최초 여성 강력반장이 됐다. 1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 전 경정은 어떻게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이 될 수 있었냐는 질문에 ‘순간순간의 책임감에 집중했던 결과’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여경이 생소한 시절 아닌가. 어떻게 형사가 될 생각을 했나.
▲어릴 때부터 직업이 삶의 태도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자 아니면 경찰이 되려고 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고, 내 삶에 보람이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순경 공채에 합격한 1987년만 해도 전국 경찰서에 여경이 없던 시절이었다. 경북 영덕 출신인데 시골에 있다 보니 이런 상황 자체를 몰랐고, 오히려 그래서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보다는 취업을 먼저 생각했는데 고2 때 찾아간 한국취업정보센터에서 ‘고졸도 가능하다’는 문구를 보고 경찰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30년 넘는 형사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궁금하다.
▲첫 살인사건 현장은 30년이 더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다. 당시 현장이 양천구의 한 골목길이었는데 여성의 사체가 옷은 다 벗겨져 있고 대변이 그대로 나올 정도로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습이었다. 여형사가 워낙 없던 시절이라 도착하자마자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던 분위기 역시 아직도 생생하다. 강간당하는 과정에서 죽는 것이 강간치사인데 전형적인 강간치사 사건이었다. 사체의 직장 온도를 재기 위해 온도계를 넣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있다. 10년이 지난 뒤에 양천서 팀장으로 갔을 때 가장 먼저 열어본 사건도 이 사건이었다.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오래 한 자가 가져가야 할 명예다. (여자라는) 희소성이 있었고 꾸준히 오래 했다. 형사가 되기도 바빴기 때문에 롤모델로 삼을 여형사도 없었다. 최초라는 말에 대한 개념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요즘은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없는데, 그 계급에 조건이 됐는데 발령이 안 나면 그게 문제였을 것 같다. 1건씩 사건을 해결하는 사이에 승진이 찾아왔고 해당 보직에서 역할을 해내면 다음 보직이 왔다.
-경위까지 9년 만에 초고속 승진했는데 어떻게 가능했나.
▲형사로서 오롯이 책임감에 집중해서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다. 피해자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고객이라고 생각하고 24시간 전화를 받았다. 한 번은 일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에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지만, 만남의광장에서 너무 피곤해서 자다가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친구들이 모임에 나오라고 하면 ‘여름날 개처럼 헉헉거리면서 일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다 떨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간 자리다.
-여형사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신창원 사건 특별팀에 합류했을 때 ‘웬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표현)가 왔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강남경찰서 강력계장으로 갔을 때는 기자들로부터 ‘립스틱 효과’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너무 일상적으로 깔려있었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밀리지 않고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맞대응하거나 ‘실력으로 평가하라’는 말로 받아쳤다. 우리 모두 각자의 태생적 한계가 있다. ‘저 아들은 그런 엄마가 키웠겠지’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가장 절망하고 힘들었던 순간은 기름 절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맡았을 때가 20대 후반이었는데 사건 중에는 정말 모르겠다 싶은 사건도 많다. 절도사건 첩보를 받았을 땐 굉장히 고무돼 있었고, 경장 시절 패기로 당시 호남정유 임원까지 불러가며 열심히 사건 해결에 나섰지만 결국 이 사건의 범인을 구속하지 못했다. 계기판이 없어 기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몇 ℓ를 빼냈는지 측정할 수 없었고, 피해액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범인은 젊은 청년이었는데 오히려 ‘있는 사람 것 좀 빼먹으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절도는 나쁜 것이라고 하면 뭐하나. 총량을 못 밝혀서 구속을 못 하는 바람에 어린 마음에 범인한테 굉장히 분했다.
-신창원·정남규 등 악명 높은 범인들을 수사한 걸로도 유명하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요즘엔 신창원에 대한 이야기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 사람들을 계속 회자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있다. 지난해 신창원은 교도소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고, 정남규 역시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을 보며 ‘낙인이론’을 생각하게 되는데,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기 전) 어린 날의 그들에게 불량 학생이라며 낙인찍고, 머리 1대 쥐어박기보다 왜 그랬냐고 물어봐주는 누구 하나가 없었느냐는 안타까움이 있다.
-수많은 강력범을 만났을 텐데 두렵지 않았나. 이를 어떻게 극복했나.
▲나도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직면하고 넘어선 나를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불안과 두려움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다. ‘직면하라’는 말을 하면서 현장에서 부딪혔다. ‘저번에도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건에도 실패한다. 사건마다 디테일하게 계획해야 하고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하고 극복해야 한다. 나는 오히려 무조건 자신하는 사람을 제일 두려워한다. 그 사람이 제일 실패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경력으로 형성된 맷집도 필요하다.
-명예퇴직했는데 왜 그만두게 됐나.
▲직업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고 도구다. 돈 버는 일이 내 삶의 태도와 일치해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만 높이 올라갈수록 손발이 멈추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잔소리하게 됐다. 무료하게 느껴졌고, 도구를 바꿀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계속 범인 잡는 얘기를 하며 살다가, 50대가 되니 입으로 직원들한테 ‘하라 마라’ 소리만 하게 됐다. (일에만 빠져 사느라) 20대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보니 50대를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은퇴 뒤의 삶도 궁금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다시 가열차게 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은퇴 이후 제주도에 내려가 책방을 하고, 예술가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예술품을 보러온 고객들이 (작품을) 보는 모습이 정말 좋다. 작품 몇 점을 팔았는지보다 이제 계산이 없는 것도 한번 해보자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나이 들어가는 자로서 가질 수 있는 태도 아니겠나.
-인생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미숙하다는 걸 인정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막막함은 당연한 것이다. 경험치가 없으니까. 미숙하고 맷집이 없기 때문에 벽을 만난 느낌이 들면 창문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런데 창문을 열면 또 바람이 들어온다. 그게 당연하다고 인정하라. 맷집이 구체화돼야 하고 매 단계 성장이 있어야 하고, 성숙해지면 전문가가 된다. 그런데 또 영원한 전문가는 없다. 사회는 계속 바뀐다. 저의 경우 사건이 매번 특진을 가져다줬고, 그 자리를 소화해나가니까 다음 자리가 또 왔다. 살아보니 위기는 항상 선물을 숨겨서 왔던 것 같다.
박미옥 전 경정은
여자 경찰이 생소하던 시절 1987년 순경 공채에 합격해 19살부터 경찰이 됐다. 1991년 서울지방경찰청이 여자형사기동대를 선발하면서 국내 최초로 강력범죄를 수사하는 여성 형사가 됐다. 이후에도 최초 여성 강력반장, 최초 여성강력계장 등 그녀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탈옥수 신창원,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등을 수사했으며 '히트', '시그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등 유명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부애리 기자 aeri34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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