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만나는 법]
"삶은 내가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걸 찾는 과정"
"방황해야 한다면 성취감 경험하는 방황 하라"
"성취가 없으면 방황의 피로감에 빠지게 돼"
"작아도 성취 하면 자신감 얻고 또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어"
인터뷰 전날 김태민 변호사(50·변호사시험 1회)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사전에 인터뷰어가 준비한 질문 내용을 보기를 원하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아닙니다, 생방송을 좋아합니다.”
거기서부터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솟았다. 그동안 인터뷰했던 대부분의 법률가들은 예측가능한 것을 선호하는 직업적 자의식 때문인지 사전 질문지를 받아볼 수 있기를 바랐던 것에 반해 김 변호사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 것.
그의 색다른 면목은 대면했을 때도 확인됐다. 김 변호사는 말쑥한 남방 위에 니트를 받쳐입은 캐주얼 차림이었다. 수트에 타이를 맨 법률가들의 전형적 입성과는 확연히 달랐는데 거기에다 엄청난 동안이기까지 해서 IT기업의 대리급 직원 같은 활력마저 느껴졌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은 내가 알고 있는 자존감 높은 이들의 특징인데 그에게 성장 배경부터 물었다.
“부모님은 모두 경상도분이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 대에 서울에 올라온 건데 왕십리 쪽에서 태어나서 천호동, 명일동 등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고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는 평범한 가정이었구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각자 책임을 다하자’라는 가훈을 말씀하셨어요. 그때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책임만 강조하는 삭막한 가훈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족 구성원이 최소한 자기가 할 일을 다할 때 서로 신뢰가 생기고 가족으로서의 원만한 관계가 유지된다는 걸 가르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말씀대로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다했고 어머니는 내조와 양육에 집중하신 거죠. 학생인 저와 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됐고요. 책임감과 자유라는 말을 그때 배웠달까요.”
세속적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와 인터뷰를 하게 된 모티프가 될 텐데, 김태민 변호사에게 변호사는 물경 열 번째 직업이다. 그것도 30대 후반에 선택한. 그는 점수에 맞춰 서울대 식품영양학과에 진학한 뒤 적응하는 데 실패해 5년 만에 그만두고 상명대에 입학했으나 금방 곧 자퇴하고 군역을 치르고 돌아와서는 다시 인천대에 입학해 학사 자격을 비로소 손에 쥔다. 그런데 그의 노마드적 행보는 30대까지도 이어진다. 학원 강사, 중소기업 해외 영업자, 외국인 투자유치 계약직 공무원, 식품의약품안전처 공무원 등이 그가 손에 쥐어본 명함의 화려한(?) 내력인 것. 결정타는 주변에서 만류하는 데도 식약처 공무원 자리를 내려놓고 로스쿨에 들어가 변시를 보겠다고 결정한 대목. 무엇이 그토록 그를 헤매게 한 것일까.
“지금 돌아보면 삶이 20대 때나 30대 때나 지금이나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왜 저걸 하지, 이런 소릴 들으면서 불필요해 보이는 시도들을 한 거예요. 당연히 다 성공할 수 없으니까 많은 실패를 했죠. 그래도 나에게 맞는 것을 꼭 찾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늘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에게 맞는 걸 끊임없이 찾는 게 잘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삶은 내가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걸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학교나 전공도 마찬가지고, 직업도 그렇죠. 가장 오래 일한 곳이 식약청에 2년 2개월이고 다른 곳에선 1년 8개월, 몇 개월 이런 식으로 옮겨 다녔는데,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과감히 그만뒀어요. 그렇게 배수의 진을 쳐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야 절실한 마음이 생겼거든요. 맞지 않아서 중단한다고 해서 인생이 망가진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건 무슨 뜻일까?
“변호사가 제 천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변호사를 하고 싶었으면 사법시험 때부터 준비했겠죠. 그런데 제가 다른 일을 하면서 생활을 도모하던 중 로스쿨이 생겼고 변시를 봐서 변호사가 되면 공무원보다는 생활에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거예요. 생계유지를 위해 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한 가지였던 거죠. 이 직업의 매력이라면 이전에 가져보았던 직업보다는 좀더 많은 수입을 안겨주고(웃음), 사실 사람 만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성향인 제 입장에서 보면 저를 필요로 해서 찾아오는 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만의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서 의뢰인들을 도울 수 있다는 보람이 있다는 거예요.”
등록 변호사 숫자가 3만 명을 훌쩍 넘어선 시대다. 당연히 당사자들이 가지는 직업적 자의식도 모래사장을 투과한 빛의 스펙트럼처럼 분화될 수밖에 없을 텐데,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변호사를 어떤 ‘지위’나 ‘권한’으로 간주하면서 배타적인 이익을 꾀하는 데 집중한다. 삶의 풍속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한다면 이는 얼마나 쉬우면서도 허망한가. 그런데 내 눈에 김태민 변호사가 신선하게 다가왔던 건 그의 직업적 무의식이 무명을 좇는 도가적 미니멀리즘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뭔가를 내려놓고 지워버린 자에게서 느껴지는 허허로운 자유 같은 것. 대부분은 경쟁에 참여해 이기고 타인보다 지배적인 위치에 설 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거기서 쾌감을 느끼는데, 그는 이런 통속적 대열에서 좀 이탈해 있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
“사는 동안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고 올라가 본 적도 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제가 대형로펌 일원도 아니고 개인 변호사잖아요. 저는 이게 생업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어떤 영향력을 도모하지도 않아요. 술도 안 마시기 때문에 사람들 만나서 친교를 하고 ‘형동생’ 관계 맺고 이러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 것에 익숙하지도 않구요. 그런데 제가 법조 시장의 주류 문화나 질서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제가 법대를 나와서 판검사를 하다가 변호사가 된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늦은 나이에 변호사를 시작했으니 주류에 합류할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받아들이면서 이 직업을 선택한 거예요.”
아무려나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식품전문, 식약처 공무원 출신 변호사다. 식품전문 변호사라는 캐릭터를 그도 적극적으로 미는 인상이다. 식품전문 변호사로서 그가 맡았던 가장 인상적인 사건 하나를 들려달라고 했다.
“해방 이후 식품 사건 중에 처음으로 벌금 120억이 걸린 사건이 있었어요. 식당에서 쓰는 향미유라는 게 있어요. 삼겹살 같은 걸 찍어 먹으라고 참기름에 식용유를 섞어서 내놓는 거예요. 그런데 향미유에서 발암물질 벤젠이 검출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벤젠이라는 게 생수에도 있고 공기 중에도 있는 것인데 당시 1심에서 수사관과 검사 그리고 판사까지 먹는 것에 벤젠을 넣었다고 오해를 했던 것 같아요. 회사 관계자들이 3년 6개월 징역받고 벌금 합계가 2백 억이 떨어졌어요. 회사는 연매출 80억 정도 되는 중소기업이었는데요. 그런데 제가 2심부터 대리를 맡아서 최종제품에서 벤젠은 극소량이 나왔고 중간 원료에서 나왔는데 그건 최종 처리 과정에서 걸러진다는 걸 논증해서 무죄를 받고 그게 확정이 됐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건 회사는 이미 소송의 이미지 때문에 망하고 만 거예요. 그 사건이 제가 식품전문 변호사로서 식품업계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는 모멘텀이 되었어요.”
인터뷰하는 내내 그는 일관되게 직업으로서의 변호사를 객관화시켜 설명하는 데 공을 들였다. 보통 율사에게 따라붙는 공익, 봉사, 정의실현, 억강부약 같은 거창한 개념들은 생계와 밥벌이의 숭고함 앞에서는 공허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아버지가 물려준 가훈, 자기 위치에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자기 자신에게 자족하는 것이 우리 세대 또는 우리 시대의 윤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다음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직업적 감수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제가 변호사 되기 전 몇몇 직업을 거쳤는데, 가장 많이 받은 월급이, 물론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250만 원이었어요. 그런데 제 또래 변호사들은 예컨대 4~5백만 원을 벌면서 시작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저에겐 250이 기준이 되지만 그들에게는 400~500이 기준이 되는 거예요. 제가 뒤늦게 변호사가 되어보니 300만 원이 기본 사건이고 500짜리 사건 1천짜리 사건도 있더라구요. 저는 그게 고마웠어요. 상대적으로 기준점이 다른 거니까. 제가 다른 변호사들과 생각이 좀 다른 게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월수입 300에 안도하면서 원룸이나 전세로 살면서 더 나은 삶을 꿈꾸잖아요. 제 경험으로 만들어진 정서나 감수성은 여기에 맞닿아 있어요. 제가 첫 직장생활을 인천 남동공단 제조회사에서 시작했는데, 그 회사 사장님은 대졸자들 먹물을 빼야 한다면서 입사하자마자 공장에서 연수를 시켰어요. 그때 3개월 제조 현장에서 연수를 했는데, 학교에서나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걸 느낀 시간이었죠.”
그는 의연하면서도 흔쾌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리고 그 표정은 그가 지금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있음을 뚜렷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일말의 진한 고독의 자취를 느꼈다. 아무도 이해하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길고 긴 암중모색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그가 수천 번 수만 번 떨쳐냈을 회유와 유혹 앞에서의 고독을. 그런데 그는 그걸 견뎌내고 지금 열 번째만에 찾은 직업의 윤리를 수행하고 있다.
“김예원 변호사님처럼 장애우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데 애쓰시는 변호사님들도 물론 계시지만 판검사 지내신 분 중 변호사가 되자마자 ‘장사꾼’처럼 돼버리는 분들도 있는 게 현실이잖아요. 저는 여전히 삶의 중요한 가치가 뭔지, 제가 무얼 잘할 수 있는지를 찾고 있어요. 무얼 하면 정말 행복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을까를 계속 궁리하는 거죠. 그런데 정말 모르겠어요. 변호사는 생계에 유리한 직업이지만 다른 무언가가, 제가 행복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속지 않는 자, 방황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안착하기 위해,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기꺼이 현실의 수많은 논리와 타협한다. 말이 타협이지 속는 것이다. 돈과 자본에 속고, 성공의 신화에 속고, 종교의 복음에 속고, 정치적 신념에 속은 자들은 그것을 추구하는 삶에 온전히 자신의 삶을 겹쳐놓는다. 그러니 방황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정한 길을 착실히 가면 되니까. 그런데, 그 무엇에도 속지 않은 자는 결국 방황할 뿐이다. 끝없이 그 내면에선 바람이 불 것이다. 내 눈에는 김태민 변호사가 딱 그런 이처럼 보였다. 그에게 부러운 것은 없는지 물었다.
“저도 돈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요(웃음). 그런데 제가 제일 부러운 건 여유 있는 삶, 시간의 여유 같은 거예요. 무엇보다 제가 지금 초등학교 6학년짜리 딸, 2학년짜리 쌍둥이 남자애들, 일곱 살짜리 막내딸이 있는데, 그애들이 지금 한참 아빠가 필요한 시기잖아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제일 부럽죠. 사실은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저보다 행복하게 사는 분을 보질 못했어요. 제가 지금 이 정도로 살고 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지금이 참 감사해요.”
그는 법률신문 리걸에듀센터와 공동 기획으로 막 법조시장에 나온 변호사들 중 영업방법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분야를 전문화하거나 영역을 넓히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맞춤한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교육사업을 하기로 했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 일환으로 그에 필요한 정보를 담은 책을 내자는 데 합의해서 원고를 법률신문 측에 넘겼다는 것이다. 책 출판과 교육을 통해 경쟁이 치열한 변호사 시장에서 틈새시장을 찾아서 자신처럼 생존하는 변호사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방황을 피할 수 없는 젊은 세대에게 조언 한 마디를 해달라는 요구에 이렇게 말했다.
“방황을 해야 한다면 작은 것에서라도 성취감을 경험하는 방황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성취가 없으면 방황의 피로감에 빠지게 되거든요. 작은 거지만 하나라도 성취를 하면 거기서 자신감을 얻고 또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는 동력이 되거든요. 너무 큰 것을 좇는 방황을 하기보다는 계속 작은 시도를 하는 방황을 하면 좋겠어요. 그게 제 경험에 비추어보니 꺾이지 않고 지금까지 온 비결 같아요.”
‘생방송’은 이렇게 훈훈하게 끝났다. 그는 바로 집으로 퇴근해 아이들과 놀 생각이라고 했다. 그때가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김도언(시인·소설가)
※이 기사는 법률신문에서 제공받은 콘텐츠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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