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 8600만원짜리 벤치를 보고 계십니다.”
7일 찾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투어 현장. “8600만원짜리 벤치”라는 도슨트의 말에 기자들의 눈이 쏠렸다. 다만 가격이 8600만원이라는 뜻은 아니다. 투명 벤치 안에 담긴 돈가루가 5000원권 지폐 19kg로 이뤄져 8600만원어치라는 의미다. 더이상 쓸 수 없는 폐지폐를 가루로 만들어 채웠다. 일종의 ‘지폐 업사이클링’인 셈이다. 화폐박물관에는 곳곳에 이런 벤치가 있다.
화폐박물관은 일반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돈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상업과 공업 발전을 불러일으킨 상평통보부터 한은이 처음으로 찍은 돈, 현재 통용되는 화폐까지 모두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화폐뿐만 아니라 김일성 전 주석이 그려진 북한 지폐와 세계 각국의 화폐도 모여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1층 화폐광장에서도 다량의 화폐를 볼 수 있다. 공식주화 8종류가 쌓여있는 '동전 피라미드'가 전시돼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실상 발행을 중단한 1원과 5원도 있다. 피라미드 안에 든 동전은 총 4400개, 값어치로 따지면 72만5000원이다. 2층에 놓인 '모형금고'는 금고털이 영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1000원권부터 5만원권까지 사람 키 높이만큼 쌓아뒀는데, 진짜 돈과 가짜 돈이 섞여 있다.
2001년 6월 12일 개관한 화폐박물관은 본래 1910년대 일본에 의해 세워졌던 조선은행(朝鮮銀行) 청사 건물이었다. 이후 1950년 6월 한은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 되면서 현 본관이 생기기 전까지 본점 건물로 역할 했다. 박물관은 우뚝 솟은 본관 앞에 서양식 석조건물로 자리 잡고 있어 웅장한 느낌을 더한다. 박채영 도슨트는 “지을 당시 커다란 규모로 만들기 위해 르네상스풍의 건축 방법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건물 정초석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로 알려진 기록이 새겨져 일본의 금융 침탈 흔적을 보여주고, 건물 외관에 6·25 전쟁을 견뎠음을 보여주는 총자국도 남아있다. 1981년 우리나라의 사적 제280호로 지정된 이유다. 매년 한은 신입 행원들도 입사 초 발령받기 전 역사 교육 차원에서 이 박물관을 들른다고 한다.
1층에서 한국은행 연혁이 적힌 벽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 '한국은행 기념홀'에 들어서면 옛 총재실을 재현한 전시실이 나온다. 한은 총재가 1987년 신축 본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업무를 수행했던 집무실을 재현했으며, 역대 총재의 초상화와 약력·자료를 볼 수 있다. 총재 자리 뒤 벽에는 큰 글씨로 '통화가치의 안정'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총재실 옆 방에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첫 회의 장면을 재현한 공간도 마련돼있다. 벽면에는 1950년 6월 5일 처음 열렸던 회의 장면이 그림으로 전시돼있다.
도심 한복판에 놓인 화폐박물관. 근처에 일터가 있는 직장인이라면 바쁜 하루 중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문화 공간이다. 다만 주중에는 예약 없이 자유 관람을 할 수 있지만, 주말과 휴일에는 반드시 사전예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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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박물관은 2019년까지 매년 20만명 넘게 방문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2020년도에는 2만명대, 2021년에는 3만명대로 방문객 수가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약 12만명이 방문했고, 올해는 상반기에만 9만명이 박물관을 찾으며 서서히 방문객 수를 회복 중이다. 한은에 따르면 2001년 개관 후 누적 방문객 수는 327만 6036명이다. 설범영 화폐박물관팀 과장은 "팬데믹 이후 기획전을 재개하는 등 박물관이 정상 운영되고 있어 외국인 관광객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박유진 기자 geni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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