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감독 '유랑의 달' 타인 이해·공감 호소
사회 비판·저항 용인하지 않은 日 사회 비판
진실 아는 사람 곁에서만 온전해지는 개인들
노래방에서 뒤풀이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직원들. 뒤늦게 가나이 사라사(히로세 스즈)가 합류하자 노래를 멈추고 모여든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준다. "이건데…. 가나이 씨에게 말해야 하나, 많이 의논했어." 가나이가 어린 시절 겪은 사건이 설명된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가나이 사라사 양(당시 10세) 납치 사건.' 가나이는 개의치 않는다. 당시 신문·방송에서 떠들썩하게 보도해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업데이트된 내용을 확인하고는 낯빛이 어두워진다. '범인 사에키 후미, 최근 마츠모토 시에서 목격, 사진 있음.' "그 사람, 가나이 씨 유괴한 범인이지?" "경찰하고 얘기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 "가까이 있을지도 몰라. 일 터지고 나서는 늦어. 괜찮아?"
이상일 감독이 연출한 '유랑의 달'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호소하는 영화다. 회사 동료들의 걱정이나 염려가 아니다. 오히려 이를 지나친 관심과 편견으로 비추며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다. 가나이는 유괴된 적이 없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는데 새 거처인 이모 집에 가기를 꺼렸다. 사촌오빠가 밤마다 몰래 방으로 들어와 몸을 더듬어서다. 가나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 늦게까지 책을 읽으며 귀가를 미뤘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우산을 내밀어준 대학생 사에키(마츠자카 토리)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두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 그러나 사에키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즐거운 시간은 끝나버렸다.
연인인 료 나카세(요코하마 류세이)와 회사 동료들은 가나이를 피해자로 규정해버린다. 매사 불쌍히 여기고 조심히 대한다. 알고 보면 애써 이해하는 척할 뿐이다. 사에키를 감싸는 모습에서 스톡홀름 증후군도 의심한다. 개입이 지나칠수록 가나이의 얼굴은 굳어간다. 애초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제대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 문제없어 보이지만 내면은 불안에 잠식된 지 오래다. 누명을 쓰고 처벌받은 사에키의 삶은 말할 나위 없다. 일본에서 범죄자는 혐오의 눈빛에 둘러싸인다. 욕설이 담긴 편지와 전화, 낙서는 거의 익명. 주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집단에 분산돼 집요하고 과격하게 행동한다. 세상이라는 이름과 얼굴로 행해져 거리낌이 없다. 익명성이 극대화된 인터넷은 이런 세상의 폭주를 더욱 부추긴다.
서구에서 시민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 자리 잡아 구성됐다. 중세 왕권에 맞서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개념으로 발달했다. 일본에서는 애매모호한 '세상'에 의해 개인이 만들어졌다. '세상'에 인권과 권리는 빈약하다. 이해관계만 존재한다. 받으면 되돌려 주어야 한다. 차이는 개인주의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서구에서 핵심은 사회 비판과 저항의 용인. 일본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용 사례를 집단의 안정을 위협하는 개인의 일탈로 치부한다. 뒤늦게 사에키를 감싸는 가나이가 여기에 속한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나기라 유의 동명 소설에서 초탈의 경지에 이른다.
"나와 사에키의 관계를 표현할 적당한 말, 세상이 납득할 말은 없다. 거꾸로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많다. 우리가 이상한 걸까. 그 판단은,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미 거기 없으니."
특수 관계에서만 유효한 독백이 아니다. 많은 사회가 지금도 피해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일부는 피해자가 된 데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막연하게 추측한다. 피해자 측에도 잘못이 있다는 논리와 연결돼 편견을 생성한다. 이를 깨뜨리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면 과민 반응이라며 또 다른 공격을 퍼붓는다. 일련의 과정에서 매스컴 보도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피해자의 프라이버시를 무차별적으로 폭로해 편견과 아집을 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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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분법으로 규정된 가나이와 사에키 뿐이다. 서로의 곁에서만 온전해진다. 장벽과 구분을 초월해 관계도 더없이 끈끈하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에 전보다 수월하게 잃어버린 삶을 되찾을 것이다. 어둡고 긴 밤이 아니더라도 빛나는 낮달처럼. "나하고 있으면, 어딜 가더라도…" "그러면 또 어딘가로 흘러가면 그만이야."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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