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민지 기자] 직장인 이 모씨(30세)는 아침 출근 후 HSCEI(홍콩 H지수)를 확인하는 것이 일이 됐다. 지난해 4월 주변 권유에 은행에서 홍콩H지수에 투자하는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에 가입했는데, 먼저 가입한 친구들이 녹인(원금손실) 문자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녹인 조건이 기준가 대비 45%로 아직 여유가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가격이 더 내려갈까 노심초사다. 이씨는 "예·적금보다 조금 더 많은 이자를 바란 것이 욕심이었던 것 같다"며 "원금만이라도 잘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홍콩 H지수가 지난 한 달 동안에만 15% 넘게 폭락하면서 주가연계증권(ELS) 녹인 공포가 또다시 커지고 있다. 경기 침체 우려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3 연임 소식에 지수가 17년여 만에 5000선 아래로 밀려서다. 이달 들어 소폭 상승세를 보이긴 했지만, 대외적인 여건이 개선되지 않은 지금, 추세적인 오름세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관련기사] '홍콩ELS 트라우마'
6일 아시아경제가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시스템 세이브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부터 이달 4일까지 기초자산이 홍콩 H지수인 '베리어' 있는 공모형 ELS 가운데 녹인에 진입한 ELS는 총 967개다. 원금손실구간에 진입한 투자금액만 5조4562억원에 달한다. 원금손실 구간에 진입한 ELS는 모두 지난해 1월부터 10월에 집중적으로 발행됐다. 발행 당일 홍콩H지수는 기준가격 대비 45~60% 하락했을 때 원금 손실이 발생 할 수 있다고 고지된 원금비보장형 상품들이었다.
홍콩 H지수는 지난달 31일 기준 4938.56으로 장을 마감했는데, 장중 4919.03까지 내려가며 17년여 만에 5000선 아래로 떨어졌다. 연간 하락률은 39%에 달한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6000선 아래로 내려간 적은 없었지만, 중국발 리스크가 장기화되면서 외국인 투자자 이탈(패닉셀링)이 가속화됐다. 여기에 플랫폼 기업 국유화 움직임, 홍콩 증시 부양 의지 부재, 경기침체 우려를 확대할 수 있는 시진핑 주석의 3 연임이 확실시되면서 이달 들어서만 지수는 15%나 폭락했다. 정진수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올해 홍콩거래소 전체 거래량 중 공매도 거래대금 비중은 23.4%인데 시진핑 주석의 연임 우려로 이달 초 홍콩 증시 내 공매도 비중은 29.7%까지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지수가 빠르게 내리면서 손실구간에 진입한 투자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난해 11월 발행된 ‘키움증권 1715(ELS)’는 홍콩 H지수의 발행 가격이 연초보다 낮아지면서 8966.77로 결정됐는데, 지난주 녹인 구간인 (발행가의 58%) 5290선 밑으로 추락하면서 원금손실을 확정 지었다. 원금손실구간을 터치했다 하더라도 발행 조건에 따라 ELS가 만기 시까지 상환조건을 충족한다면 사전에 약정된 수익률로 자금을 상환받을 순 있다. 그러나 현재 원금손실을 확정지은 ELS의 경우 만기상환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선 30% 넘게 지수가 상승해야 한다. 예컨대 ‘키움증권 1715’의 경우 다른 기초자산이 녹인 구간에 진입하지 않았다고 가정했을 때, 홍콩H지수가 만기일인 2024년까지 34% 상승해 6725를 상회해야만 약정된 수익률을 받아낼 수 있다.
녹인을 찍은 종목 중 원금 회복이 요원한 종목들도 있다. 지난해 2월 65억원 규모로 발행된 '삼성증권 25689(ELS)'의 마지막(5차, 내년 8월25일) 조기상환 요건은 홍콩H지수가 9373.93을 상회해야 하는데, 지금 수준보다 70% 넘게 올라야 한다. 만기일인 2024년 2월이라도 투자자금을 온전히 돌려받기 위해선 지금보다 60% 이상 오른 8788.86을 상회해야 하는데, 해당 요건을 맞추지 못할 경우엔 원금 손실이 확정적이다.
이민지 기자 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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