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설립된 세계 첫 치매마을
직접 장보고 먹고 싶은 음식 요리
선택과 취향 존중…25개 클럽활동
치매 관리 선진국 네덜란드 가보니
[아시아경제 비스프(네덜란드)=김영원 기자] "후더 모르헌(Goede morgen·좋은 아침)."
청바지와 편안한 티셔츠, 원피스 차림의 두 여성이 카트를 끌고 길목을 거닐며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오전 10시 네덜란드의 호그벡(Hogeweyk) 치매마을의 골목에서는 이들처럼 마을 구석에 위치한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일행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보통의 마을과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일상복을 입고 사이좋게 카트를 미는 두 여성 중 하나는 중증 치매를 앓고 있다. 호그벡 마을의 관리인이자 설립자인 엘로이 반 할(Eloy van Hal)씨는 "방금 지나간 분들은 저조차 보호자, 치매 노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며 "그 정도로 일반적인 생활이 잘 이뤄진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치매마을 '호그벡'
호그벡 마을은 2008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치매마을이다. 1970년부터 양로원이 있던 자리를 허물고 그 자리에 그대로 1만5310㎡의 마을이 들어섰다. 공동 설립자인 자넷 스피어링(Jannette Spiering)은 1993년, 호그벡 마을 부지의 요양원에서 일하던 중 ‘이런 곳은 가족에게도 추천할 수 없다’고 느껴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하게 됐고, 2002년 치매마을의 첫 삽을 떴다. 현재 호그벡 마을에는 187명의 중증 치매 노인이 거주하고 있다. 2층짜리 1개 건물에 7명씩, 평균 85세의 거주자가 산다. 한 주택에는 고정으로 돌봄 직원 1명이 배정된다. 치매 거주자들처럼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은 주택 내부에서도 거실 안, 업무 공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컴퓨터를 이용한다. 엘로이씨는 "치매를 앓는 경우 자주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 적응을 잘 못하기 때문에 집마다 직원을 지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엘로이씨는 치매마을을 ‘작은 사회’라고 표현했다. 개인의 생활 리듬을 존중해 일상생활을 보내게 하고, 내부 건물들도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 그대로다. 치매 거주 시설이지만 도로를 인위적으로 판판하게 다듬지 않고, 일반 도로처럼 울퉁불퉁하게 유지했다. 호그벡 마을의 여러 장비의 수리를 맡은 관리실은 ‘마을’이라는 정체성에 위화감이 없도록 카메라 가게처럼 꾸몄다. 유리 쇼케이스에는 여러 종류의 카메라들이 진열돼 있었다.
이 작은 사회 속에서 가장 복합적인 역할을 하는 곳은 슈퍼마켓이다. 대량 조리 및 배식을 하는 요양원과 달리 호그벡 거주자들은 스스로 먹고 싶은 음식을 정하고, 요리하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향한다. 엘로이씨는 "슈퍼마켓에 가는 과정에서 사회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며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처럼 슈퍼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사람을 구경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호그벡 치매마을은 거주자의 선택권과 취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먹고 싶은 음식 외에도 하고 싶은 활동, 거주·휴식 공간 모두 개인의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큰 분수대는 슈퍼마켓을 가기 위한 사람들이 모두 거쳐 가 활발한 분위기를 띠고, 건물에 둘러싸인 호수공원은 잔잔하고 조용한 분위기로 거주자들은 성향에 맞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적극적인 활동을 원한다면 25개의 클럽 활동을 신청할 수도 있다. 음악 클럽 활동은 클래식, 포크, 재즈 등 장르에 따라 나뉠 정도로 다양하다.
주거 시설은 입소 전 사전 인터뷰, 가정 방문을 통해 파악된 성향에 맞게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도시형 숙소에는 주로 수도인 암스테르담에 살았고 외향적인 성향의 거주자들이 모여 있다. 내부 인테리어도 보라색 소파, 빨간 꽃무늬 벽지로 암스테르담의 유행을 따랐다. 반면 맞은 편에 있는 전통형 숙소 거주자들은 일생을 고향에서 살아온 사람이 대다수고, 신문도 고향 지역지를 읽는다. 이외에도 격식형, 국제형 등 숙소별로 선호하는 음식, 인테리어가 다르다.
자율성은 기본… 건강·돌봄까지
치매 거주자들의 일상생활을 최대한 보장하는 과정은 신체적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엘로이씨는 일례로 파라솔 아래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파란 옷을 입은 젠틀맨’ H씨를 가리켰다. 그는 "H씨는 자발적으로 분수대를 관리하며 낙엽을 줍느라 하루에 100~200번을 돌아다닌다"며 "7년째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몸 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전했다.
활동이 줄어들며 몸이 굳는 치매 노인을 위해 물리치료실도 따로 두고 있지만, 이곳은 치료보다는 체육 클럽활동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된다. 엘로이씨는 "원래 치매를 앓으면 앉아있는 경우가 많아 물리치료, 도수치료를 자주 한다"면서 "이곳에서는 거주자들이 걸어 다니고, 설거지를 직접 하는 등 움직임이 많아 직접 치료보다 치료사들이 숙소 내부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간단하게 지시를 내리는 정도"라고 했다.
거주자들의 일상생활과 선택권을 중시하지만, 그에 맞는 돌봄 지원도 꼭 필요하다고 엘로이씨는 강조했다. 예를 들어 한 가지 클럽 활동을 하는 공간에서 여러 활동을 동시에 진행하지 않는 점이 그렇다. 그는 "요양원에서는 한 공간에서 복합적인 활동을 하는데, 치매처럼 뇌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그 공간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며 "호그벡에서는 음악 클럽 활동을 하는 공간은 명백하게 음악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호그벡 마을의 형식을 본떠 해외 각국에서도 치매마을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유행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최초의 치매마을 '빌라지 랑데(Village Landais)'가 문을 열었다. 프랑스의 한 대학교에서 이 마을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2019년 미국 사우스벤드에 만들어진 '밀턴 빌리지(Milton Village)'는 호그벡의 아이디어를 일부 변형해 주간보호센터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는 경기 양주시가 호그벡 마을을 지향하는 펜션 형태의 '공립 치매 전담형 노인 요양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는 양주시 백석읍에 치매안심마을 건립을 추진했지만, 최근 양주시와의 건축 협의 부동의 처분 취소 소송에서 패배해 향후 정책심의회를 통해 방향을 논의할 예정이다.
/비스프(네덜란드)= 김영원 기자 forever@
김영원 기자 fore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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