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범죄자 124만여명 가운데 정신상태 '정상' 61.6% 불과
살인범 716명 중 407명은 정신이상 및 박약·주취 등 심신 미약
[아시아경제 유병돈 기자] “환청이 들렸습니다. 피고인의 정신감정을 신청합니다.”
서울 구로구에서 지나가던 노인들은 연달아 폭행해 한 명을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중국 국적 남성 최모씨(42) 변호인의 항변이다. 필로폰을 투약한 채 길에서 마주친 행인을 폭행해 숨지게 하고 금품을 갈취한 최씨는 범행을 모두 인정했다. 다만, 최씨 측 변호인은 서면을 통해 재판부에 정신감정과 양형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정신감정을 신청한 사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지하철 9호선에서 시민을 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이 진행 중인 20대 여성 A씨도 재판 과정에서 줄곧 우울증을 앓았다고 주장했다. A씨는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과거 따돌림을 오랫동안 당했다”면서 “최근 정신적으로 우울증과 분노조절 장애가 있었지만 치료를 받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주요 범죄 피고인들이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31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검거된 범죄자 124만7680명 가운데 범행 당시 정신 상태가 ‘정상’으로 집계된 인원은 76만8714명으로 61.6%에 불과했다. 10명 중 4명 가까이가 ‘심신미약’ 상태였던 셈이다.
특히 강력범죄를 비롯한 주요 범죄 피의자 절반 이상이 ‘심신미약’ 상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살인범죄자의 경우 전체 검거 인원(716명)의 56.8%(407명)가 정신이상·정신박약·기타정신장애·주취 등 심신미약 상태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강간범죄자도 같은 비율이었고, 강제추행범죄자는 54.5%, 폭행범죄자는 56.9%가 심신미약이었다.
형법 제10조 2항은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평소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술, 마약 등 향정신성약물로 심신미약 상태에 빠진 경우 감경 대상이 될 수 있는데, 해당 규정은 재량 조항으로 심신미약을 통한 감경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재판부 판단이다.
심신미약을 인정받으려면 불법 여부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이 결여돼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전문의의 피고인 면담, 질문지 검사 등 정신 감별 절차를 거친다.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은 이전부터 계속 불거져 왔다.
최근 경기도 김포시에서 한 조현병 환자가 14개월 된 아기를 이유 없이 넘어뜨려 다치게 해 피해 여아의 모친이 온라인에 정신질환자 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법의 개선을 간곡히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자들의 주요 공략에 해당 논란이 포함되기도 했다.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주취 감형 전면 폐지’를 내세우는가 하면, 국민의힘도 “흉악범죄의 경우 심신미약 주장 등이 받아들여지는 요건을 강화하는 개선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병돈 기자 tamon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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