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된 옛 창전동 우체국 건물
2015년 김선형 대표가 개조
경계없는 예술 위한 이상적 공간
삶과 밀착한 실천적인 예술 전시
예술가 일상 조명한 기획전 눈길
소통으로 가득한 전시관이 목표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현대 예술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유휴공간 재활용이다. 버려진 발전소를 예술가들의 허브(hub)로 탈바꿈한 영국 '테이트 모던', 폐쇄된 지하철역을 재활용한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수명이 다해 쓰임새가 사라진 옛 건물을 무조건 허물어내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웅변해준다. 옛것에 새 역할과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자 공간을 재창조하는 숭고한 과업이다.
이제 미국이나 유럽 국가 등 서구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유휴공간을 재활용한 예술 공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경제가 만난 '탈영역우정국'은 특유의 독특한 개성을 유감없이 발하며, 수많은 예술가들과 관람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탈영역우정국이 간직한 매력은 무엇일까.
서울시 마포구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인근에 들어선 주택가 한가운데에 탈영역우정국이 위치해 있다. 약 50년 전, 서울을 둘러싼 고층 아파트와 현대 건축물들이 채 골조를 드러내기도 전인 1970년대 초 당시 이 건물은 창전동 우체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도 탈영역우정국에는 우체국 시절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건물 내부의 커다란 금고, 폐기물을 태울 때 쓰던 소각로 등이 그렇다.
지난 2015년, 서울 우체국 통폐합으로 인해 본래 임무를 잃고 텅 빈 상태였던 창전동 우체국은 김선형 대표의 손으로 개조됐다. 당시 복합 문화예술 공간을 만들기 위해 여러 폐건물을 찾아다녔다는 김 대표는 "이 공간이 해오던 역할" 때문에 우체국을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회화·설치·조각 등 예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실험적 예술, '다원 예술'을 하던 그는 "작업을 하다 보니, 각 예술 분야들을 가르는 경계는 이제 많이 희미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 느낌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은 갤러리나 미술관이 아닌 이질적인 공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예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역할을 맡은 폐우체국이야말로 '경계 없는 예술'을 실현할 공간으로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탈영역우정국은 형식적 예술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다. "예술은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김 대표는 "확고한 주제의식,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실천적인 예술을 지향한다"고 풀어줬다.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 있는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선보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최근 전시가 이뤄진 박봉수 작가의 개인전 '몽상가들의 모임'을 들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꾸는 꿈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인 꿈을 현실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꿈꾸는 사람의 뇌파를 영상화해 프로젝터로 허공에 비추는가 하면, 꿈 내용을 자세히 적은 메시지를 디지털 정보로 바꿔 '영원불멸'하게 만들기도 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꼬집는 작품도 소개됐다. 이영주 작가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상 '리자디언들'은 유전자 조작 기술이 보편화된 미래 시대 인간의 몸이 어떻게 상품화되는지 보여주면서 현시대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남긴다.
김 대표가 특히 각별하게 여기는 이벤트는 '포스트 사이드' 기획전이다. 예술가들이 작업 외에 어떤 삶을 사는지 보여주는 특별 이벤트다. 유명 예술가들을 초청해 그들의 취미나 여가, 종사하는 생업 등을 구체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김 대표는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으로 관객과 대화를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 이상 예술 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다"며 "예술가들의 일상, 자질구레한 삶도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같은 작품 이면의 세계를 관객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삶을 강조하는 전시 테마, 예술가의 일상을 조명하는 기획까지 모두 탈영역우정국이 추구하는 예술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탈영역우정국에 있어 예술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줄 수 있는 무언가"다.
'말을 건넨다'는 행위는 소통의 시작을 뜻한다. 사람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줌으로써 호기심을 품고,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내고 또다른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예술가와 관객이 작품을 통해 서로 소통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나가는 과정이다. 김 대표가 꿈꾸는 탈영역우정국은 이같은 소통으로 가득한 작품으로 전시관을 채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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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간에는 주어진 역할이 있으며, 그 공간이 낡거나 소용이 다했을지라도 누군가에게 기억될 사라진 역할을 담고 있다. 탈영역우정국의 과거 이름인 창전동 우체국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을 처리하며 사람들의 소중하고 뜻 깊은 일상을 중개하고 연결해주는 공간이었다. 사람 사이의 소통을 돕는 '다리' 역할을 했던 셈이다. 반세기 전 사람 사이를 이어주었던 우체국처럼, 탈영역우정국은 이제 사람과 예술작품을 잇는 교두보가 돼가고 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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