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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B]환갑의 활동가上_"여성운동 17년, 하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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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소수 더나은 비주류 세상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활동가로
성폭력 문제 해결 힘들어보였지만
내가 알게 된 것 나누자는 생각으로

[편집자주] 성매매 특별법 제정과 호주제 폐지, 낙태죄 헌법불합치에 이어 지난달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까지. 2000년대 여성운동은 변화의 바람 속 방향을 정하는 길목의 역할을 했다. 그 바탕엔 여성 피해자들이 법 앞에서 두 번 희생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여성운동 활동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설립 29주년을 맞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환갑을 맞은 활동가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변혁의 현장에 있었던 활동가 정정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원장(上), 이미경 소장(下)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만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이드B]환갑의 활동가上_"여성운동 17년, 하길 잘했어요." 정정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원장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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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내가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 특별하게 운이 좋았던 그런 경우였구나 문득 깨달았죠. 내가 배운 것, 내가 알게 된 것을 나누는 것 부터가 시작이라면 제일 나누기 좋은 곳이 상담소니까. 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17년차 여성운동 활동가 정정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피해자보호시설) 원장은 올해 환갑을 맞았다. 평범하고 순탄한 가정 주부의 삶을 살아오다 불혹의 나이를 넘겨 활동가가 됐다.


[사이드B]환갑의 활동가上_"여성운동 17년, 하길 잘했어요."


활동가가 되려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식품 파동으로 한창 시끄러웠던 1980년대 말 주부로서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때만 해도 가사에 충실하려는 목적으로 친환경 먹거리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1991)을 계기로 환경 운동에 투신했던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1993년 한국여성민우회 환경위원장으로 활동을 했는데 그 무렵 정 원장도 민우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먹거리에서부터 환경에 이르기까지 민우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다 2004년 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여성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처음 맞닥뜨린 문제는 호주제 폐지였다. "나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호주제를 왜 폐지를 해야 하나 싶었죠. 호주가 누구건 말건 무슨 상관일까 생각했는데 어떤 분들한테 그게 큰 문제가 되고 사회 문제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이드B]환갑의 활동가上_"여성운동 17년, 하길 잘했어요." 지난해 워크숍에 참석한 정정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원장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


그 때 만해도 실제적으로 문제를 체감을 했다기 보다는 체감을 하도록 교육을 받아 문제를 인식했다고 한다. 민우회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로 자리를 옮길 때만 해도 상담소에서 일어나는 일은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다. 정 원장은 "성폭력 상담은 부담이 너무 컸다"며 "민우회에선 주로 가족 문제, 예를 들면 남편이나 고부 간 갈등을 다뤘다"고 했다.


"상담소에 와서 얘기를 듣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나도 학교 다닐 때 이상한 선생님, 이상한 아저씨들이 있었어요. 그때 서야 알았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구나."


상담소에서 활동하면서부터 정 원장은 지나다니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나영이 사건' 이후론 공중화장실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고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도 문제가 없는 지 둘러 보게 됐다"고 말했다.


위협적인 단어 하나 없이 성추행범을 쫓아 버린 적도 있다. 버스 안에서 한 여성에게 접근해 치근덕 거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여성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면서 큰소리로 "저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필요하면 저한테 전화주세요"라고 말하자 여성 뒤에 있던 남성이 바로 사라졌다.


남편과는 '전략적 평등 관계'로 문제 없어
젊은 활동가들에 배우기도
내년이면 임기 만료

늦은 활동가 생활에 가족들은 큰 힘이 돼 줬다. 정 원장은 "남편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사실 예전엔 여성운동 한다고 하면 남편이 반대하면서 막지만 않아도 나쁘지 않은 남편이라는 정도로 다들 기대치가 터무니 없이 낮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남편이 싫어하는 건 내가 하고, 내가 싫어하는 건 남편이 하는 방식으로 집안일을 분담을 했다"며 "딱 나누어서 평등하게 하자가 아닌 '전략적 평등 관계'를 유지했다"고 덧붙였다.


정 원장은 성폭력 상담 공부를 할 때 들은 말인 '모르고 살면 살지 알게 되면 전에 처럼은 못 살 것'이라는 충고를 항상 가슴에 새긴 채 활동해왔다. 그는 "여성운동이 급진적이고 무서워보이기도 했는데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고 그걸 나눠주는 게 운동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예순하나의 나이에도 정 원장은 현역이다. 여전히 피해자 상담을 진행하고 새로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공부도 한다. 오랜 연차 덕분에 달라진 점도 있다. 그는 "쉼터 피해자가 뭔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내가 뭔가 상담을 잘못했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며 "그 사람의 이정표가 있는 것이고 내가 보기엔 잘못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정표는 달라질 수 있다고 믿게 됐다"고 말했다.


[사이드B]환갑의 활동가上_"여성운동 17년, 하길 잘했어요." 한 점심시간 정정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원장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


정 원장은 내년에 성폭력상담소를 떠날 예정이다. 공식적으로 원장으로서 임기가 만료되기 때문이다.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내일이 끝나는 날이면 내일까지는 계속 하던 일을 할 것"이라며 "출퇴근 하는 것 말고는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사람과 자연을 특별히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그래서 짓게 된 활동명 '사.자.'),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는 은발의 사자 갈퀴를 닮은 여성운동 활동가로 오늘도 조용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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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음 세대 활동가들에게 "일희일비로 심신을 고단하게 하지 말고 뚜벅이처럼 지치지 않고 계속해나가길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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