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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한일간 첫 경제전쟁, '방곡령사건'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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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의 일탈에서 시작, 국제분쟁으로...일제에 빌미 제공
한반도 주변 정세 철저히 이용한 일본...결국 청일전쟁까지 연결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한일간 첫 경제전쟁, '방곡령사건'을 아시나요? 일제강점기 군산항에 집결된 쌀의 모습. 일제는 1876년 조선 개항 이후부터 조선에서 쌀과 콩 등 곡물을 헐값에 대량으로 수입코자했다. 곡물시장 독점을 두고 조선의 지방관들과 청나라 상인들, 일본상인들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갔다.(사진=우리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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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흔히 구한말 역사에서 일제의 경제침탈과 관련해 첫 머리를 장식하는 역사용어로 '방곡령(防穀令)'이란 단어를 마주하게 된다. 원래는 지방관이 자신의 임지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가격 폭등을 막는 조치로 내렸던 방곡령은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1910년 국권침탈까지 약 35년의 기간동안 100여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1889년 8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일으킨 이른바 '방곡령사건'이다. 일본과 역사상 처음으로 불거진 통상마찰이고, 일제의 경제침탈의 시발점과 같은 사건이라 역사교과서에도 등재돼있다. 다만 교과서에 축약된 내용과 실제 벌어졌던 상황간 간극 또한 꽤나 큰 사건이기도 하다.


보통 교과서에서 다루는 이 방곡령사건의 내막은 관찰사 조병식이 일본의 무분별한 쌀 수입으로 인해 함경도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이 상황을 막기 위해 방곡령을 강행하다 발생한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러다보니 조병식이 일제에 대항한 훌륭한 인물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보다 훨씬 복잡한 내막들과 당시 국제정세까지 여러가지 사연들이 중첩돼 발생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한일간 첫 경제전쟁, '방곡령사건'을 아시나요? 조병식(1823~1907)은 1889년 방곡령사건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 중이던 거물급 정치인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알려진 고부군수 조병갑과 사촌지간이었으며, 지방관으로 나간 곳마다 탐학이 심했던 탐관오리로 악명이 높았다.(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방곡령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일단 조병식이란 인물부터 살펴봐야한다. 사실 조병식이란 인물은 각별한 항일 의지를 가지고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던 충신이나 구한말의 뚝심있는 선비가 전혀 아니다. 그는 그저 조선왕조 말기의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고부민란의 장본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과 사촌지간이다. 조선왕조실록 속에 그는 수차 지방관으로 갈 때마다 탐학스런 관리로 평가받곤 했던 인물로 등장한다. 1889년 당시에는 중앙 정계는 물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주둔해 조선에서 전권을 좌우하던 청나라군과도 뇌물로 연계돼 있는 거물급 인사였다. 이런 배경 하에 숱한 탄핵 속에도 함경도 관찰사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조병식이 1889년 8월, 함경도 지역의 흉년을 구제한다며 개항지 원산항에서 콩에 대한 방곡령을 내리고, 이를 매집 중이던 일본 상인들의 활동을 공권력으로 통제하면서 이른바 방곡령사건이 시작된다. 조병식이 방곡령을 내린 이유에 대해 순수하게 평가하는 자료는 드물다. 이미 조선왕조 말엽에 방곡령은 지방수령들이 의도적으로 지역 곡물가격을 하락시켜 매집한 이후, 다시 고가에 파는 재테크를 위한 수단으로 주로 쓰였다. 이런 폐해로 인해 조선조정에서는 1894년 1월부터 아예 방곡령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일단 당시 상황은 방곡령 전면금지 이전이었다.


당시 방곡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1883년 일본과 체결한 조일통상장정에 따라 방곡령 개시 1개월 전에 일본에 통보해야했다. 조병식이 함경도에 방곡령을 내린 것은 1개월 전이었으나, 조정에 보고된 이후 이를 일본에 직접 통보하는데 오랜 시간이 지체되면서 결국 1개월을 넘겨 일본에 통보됐고, 곧바로 일본정부에서 항의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병식에게 방곡령을 해제하라 지시를 내렸지만, 조병식은 조정의 지시를 거부하고 방곡령을 이어가면서 일본 상인들의 곡식까지 압수해버렸다.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한일간 첫 경제전쟁, '방곡령사건'을 아시나요? 1885년~1887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 이후 거문도에서 사망한 영국인의 묘지 모습.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저지를 목적으로 불법적인 거문도 점령을 추진했으며, 이후 한반도는 국제사회에서 영국과 러시아간 각축장 중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병식이 조정의 명령까지 거부하며 독단적으로 밀고나간 이유는 자신과 연결된 지역 상인들을 통해 방곡령으로 곡물가를 조작해 벌어들이는 이익에 손실이 갈 것을 우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뒷배인 청군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청나라와의 군비경쟁에서 아직 밀린다는 판단하에 조선 정책에 대해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던 터라 이 일이 국제 분쟁으로 비화될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예상과 달리 매우 강경하게 나왔다. 일본 조야에서는 청과의 일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주전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이에 조선에서 또다른 분쟁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청나라 조정의 요청에 따라 조선조정은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발령내 쫓아버리고, 일본에서 요구한 배상금 11만엔은 조병식에게 직접 물도록 지시했으며, 함경도의 방곡령은 해제했다. 아직 일본이 청군에 비해 군비가 압도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저자세로 일관해 재빨리 처결해버렸다.


청나라가 이처럼 저자세로 움직인 이유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영향 때문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실권을 잃은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는 이른바 '인아거청(引俄拒淸)' 전략을 폈다. 1884년 7월 러시아와 조선이 수호조약을 체결했고, 갑신정변이 발발한 이후에는 비밀리에 밀사를 파견해 러시아와 비밀교섭에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 입장에서는 1853년 크리미아 전쟁, 1880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연달아 영국에 패배하면서 남하정책이 저지된 터라 한반도가 새로운 남하 출구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한일간 첫 경제전쟁, '방곡령사건'을 아시나요? 주변 열강에 시달리는 구한말 조선의 모습을 풍자한 그림(사진=위키피디아)


러시아 세력의 한반도 진출 가능성이 나오면서 영국은 극동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점령, 러시아의 한반도 세력확장 저지에 직접적으로 나섰다. 1887년 영국과 러시아, 청나라 3자간 합의로 영국이 거문도에서 물러가긴 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감은 팽배하면서 어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형국이 됐다. 특히 청나라 입장에서는 영국이나 러시아, 어느 나라에도 한반도와 동북아 일대에 그 어떤 개입 빌미조차 주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존에 소극적으로 나왔던 일본이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용한 덕이었다. 또한 일본은 매해 예산의 50% 이상을 군비에 배정하며 청나라와 거의 대등한 수준의 군비를 갖춘 상태였다. 방곡령사건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같은 해 12월, 공격적 대외정책을 주창하던 육군출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내각총리가 되면서 청일전쟁을 준비해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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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방곡령사건은 탐관오리의 전횡을 막지 못한 조선왕조의 총체적 무능과 영국과 러시아란 거대 세력간의 알력을 이용한 일제의 공격적인 대외정책이 빚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이 경제침탈은 곧 닥쳐올 거대한 위기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장기간 이어진 흉년과 지방관들의 수탈 속에 분노한 농민들은 동학을 기치로 전국적 봉기를 준비 중이었고,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확실히 막기 위한 지역 파트너를 선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에 전쟁차관을 제공한다. 고종이 이끄는 조선조정은 방곡령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외세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란 2개의 용어로 정리되는 조선왕조의 비극은 이미 5년 전부터 예상된 비극이었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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