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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자의 농구 이야기 2] 임영희의 ‘농구인생 제2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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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강자 객원기자] 2018-19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여자프로농구(WKBL) 아산 우리은행의 맏언니 임영희(39)가 소속팀 코치로 새출발했다. 그는 홈구장이 있는 아산에서 국내 전지훈련을 마침으로써 지도자로서 첫걸음을 뗐다. 임영희 코치를 지난 6월 18일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우리은행 구단 숙소에서 인터뷰했다. [글·사진 박강자]


[박강자의 농구 이야기 2] 임영희의 ‘농구인생 제2쿼터’ 임영희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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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희는 2018-19시즌에 여자프로농구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6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긴 여정이었다. 그는 1999년에 신세계(현 KEB하나은행)에 입단해 그해 여름리그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2008-09시즌까지 10년을 신세계에서 뛰었고, 2009-2010시즌을 앞두고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어 우리은행으로 이적했다. 이후 우리은행에서 10년을 뛰었으니 현역 생활이 무려 20년에 이른다. 명실상부 WKBL의 역사와 함께한 선수다.


■임영희의 시간들

임영희는 1990년 마산 산호초등학교 4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 그의 10대는 학창시절이었고 20대에 프로선수로서 전반기를, 30대에 후반기를 보냈다. 30년에 걸친 농구인생이란 그에게 어떤 시간들이었는지 물었다.


[박강자의 농구 이야기 2] 임영희의 ‘농구인생 제2쿼터’ 팀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임영희 코치 .


▶10대, “잘 버티고 있었던 시간”

초등학교 운동회 때 400m 이어달리기에 나가면 1등, 2등을 도맡아 할 정도로 잘 달리는 아이였다. 다른 초등학교 농구부 선생님의 눈에 띈 것을 계기로 부모님의 권유를 받고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스포츠를 좋아했고 특히 주말에 중계되는 농구대잔치 경기를 즐겨 보았다. 임영희도 그 곁에 앉아 함께 보곤 하였다.


“그 때 제가 키가 제일 크다고 해서 갔는데 웬걸요. 다른 학교에서도 키 큰 아이들만 뽑아왔으니까 제가 제일 작았던 거죠. 그래서 경기에 나가지도 못하고 벤치에만 앉아 있던 그런 시절이었죠.”


“중학교 때부터 제가 조금 기회를 봤고, 경기 뛰면서도 몇 번이나 제가 그만 둔다고 하니 부모님도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의 부모는 그런 그에게 “조금만 더 있어보자! 이제 겨우 중학생이니까 조금만 더 해보자!” 하며 옆에서 다독이고 격려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농구인 임영희가 된 원동력이 아닐까.


▶20대, “꿈을 키우면서 보냈던 시간”

그는 “20대도 10대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온도차가 있다. 임영희는 “이번에는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되돌아보면 제가 제일 잘하고 그 동안 제일 많은 시간을 들였고 가장 많이 해왔던 게 농구더라”고 했다.


“제가 프로 처음 와서 바로 우승을 했었어요. 그 때는 워낙 잘하는 언니들이 많았고 멤버가 너무 좋았었기 때문에, (정)선민이 언니 보고, 잘하는 언니들 보면서 나도 저런 위치까지 가고 싶다, 가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꿈을 키우고 있었던 것 같아요.”


“1년만 더 하자! 1년만 더 하자!”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20대를 꾸준한 노력으로 메운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은 그는 우리은행으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우리은행이 손을 내밀어주셨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꿈을 키우면서 보내던 저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던 시간이죠.”


▶30대, “농구라는 친구를 만난 시간”

임영희가 이적 후 보낸 첫 세 시즌 동안 우리은행은 6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제가 우리은행에 처음 왔을 때, 팀은 꼴찌를 하고 있었지만 농구가 정말 재미있었어요”라고 했다.


“위성우 감독님, 전주원 코치님이 오시면서 훈련은 정말 힘들었지만 농구를 재미있게 했고, 제가 하고 싶은 농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어요. 10대 때, 20대 때 못 했던 농구를 30대 때 다 쏟아 붓고 감독님의 가르침이나 채찍질에 힘을 얻어서 앞으로 달려가면서 농구만 했던 시간이었어요.”


“그 전에는 약간 싫기도 하고, 막 놓고 싶기도 하고, 놔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결코 놓지 못 하고 붙잡고 있었다면 30대 때는 정말 친구같이 걸어가는 것 같았어요.”


■ 국가대표 임영희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가대표를 꿈꾸었다. 2010년, 꿈은 현실이 되었다.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나가는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이다. 그는 “운동선수라면 다 국가대표가 꿈인 것 같아요. 저에게는 정말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라고 기억했다. 같은 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은메달,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그리고 작년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따냈다.


[박강자의 농구 이야기 2] 임영희의 ‘농구인생 제2쿼터’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기자회견하는 한국팀 주장 임영희.

“태극마크라는 것,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나간다는 책임감이 정말 크더라고요. 그래서 인천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을 따고 작년에 은메달 땄을 때 받는 느낌은 정말 색달랐고 감동이 크게 오는 것 같았어요.”


여자대표팀은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해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임영희는 그 때도 맏언니로서 주장을 맡았다.


“대회까지 해서 약 두 달 정도 함께 지냈는데 특별한 시간이었어요. 북한 선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평양에 갔다 온 것도 그렇고. 그 선수들도 언제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이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같이 있는 시간이 저희한테는 절실했죠. 정말 앞으로 못 볼 수도 있는 친구들이니까 평생 그 친구들이 생각날 것 같아요. 그 선수 세 명과 함께 오셨던 코치님까지… 그 네 명은 평생 그 이름만 딱 이야기해도 그 때 두 달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박강자의 농구 이야기 2] 임영희의 ‘농구인생 제2쿼터’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따낸 한국여자농구대표팀.

“농구 용어나 단어가 다르다 보니까 처음에는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았거든요. 리바운드가 판공잡기, 패스가 연락이라고… 서로가 순간적으로 말이 안 나와도 알아들어야 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런 단어를 서로 공유해서 외우곤 했고, 굳이 에피소드라는 것은 따로 없어도 항상 웃으면서 즐겁게 지냈어요.”


“저 뿐 아니라 그 때 참가했던 선수들도 다 같은 생각으로 너무 특별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해요.”


■맏언니에서 코치로


2018-2019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임영희는 WKBL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6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고, 우리은행 이적 후 2009-2010시즌에는 모범선수상을 수상, 이후 2012-2013시즌에 통합우승 때에는 정규리그와 챔피언전 최우수선수(MVP)를 휩쓸었다. 임영희는 600경기 출전이라는 기록에 대해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뿌듯함을 느꼈어요. 그런데 선배님들 중에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숫자의 기록만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워낙 주위에서 축하도 많이 해주시고 구단에서도 정말 크게 이벤트를 해주시고 해서 감사하게도 제가 정말 행복하게 마무리를 했다는 생각이 한 번 더 들었어요. 제가 제 생각보다 너무 오래 선수 생활을 한 것 같고요. 우승을 하고 은퇴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모습으로 축하를 많이 받으면서 은퇴할 수 있었던 데 대해서 감사합니다. 영광스러운 은퇴시간이었어요.”


“선수 때에는 휴가를 가도 다시 (팀에) 복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놓고 쉴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쉬고 나면 또 개인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운동을 하거든요. 복귀를 하면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에, 확 완전히 놓아버리면 다시 팀에 들어와서도 몸 만드는 시간이 너무 힘들다 보니 그런 부분을 계속 조금씩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긴장감 없이 아주 마음 편하게 지냈어요. 남편과 시간이 안 맞아서 긴 여행은 못했지만, 주말에 1박2일로 국내 여행 다녀왔어요.”


■제2의 농구인생

휴가를 마치고 팀 훈련이 시작됐을 때부터 코치 생활을 시작했을 그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선수들에게 이야기한 첫 마디는 뭐였을까? 그리고 앞으로 코치로서 각오 한 마디를 부탁했다.


“특별하게 팀 선수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제가 첫 훈련할 때 웨이트 장이나 체육관에서 어디에 서있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방황 아닌 방황을 하면서 있었어요.”


“일단 선수생활을 잘 마무리했으니 코치 생활도 잘 해나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고요. 일단은 처음이고 많이 배워야 하고, 해야 할 게 많으니 위성우 감독님, 전주원 코치님께 잘 배워서 제가 선수들을 가르친다기보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점이나 노하우, 이런 부분을 알려주면서 또 선수들과 감독님 사이의 관계를 제가 중간에서 잘 연결하고 팀이 잘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지금 제 역할인 것 같아요. 저희가 지난 시즌에 우승을 놓쳤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에 대해서 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분을 준비를 잘 해서 첫 코치 시즌을 잘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있었으면 좋겠다’면?

“선수로서의 우승반지는 있으니 코치로서의 우승반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박강자의 농구 이야기 2] 임영희의 ‘농구인생 제2쿼터’ 우리은행의 임영희 코치(왼쪽)와 전주원 코치.

▶전주원 코치가 본 임영희

“굉장히 성실하고 모든 일을 열심히 해요. 묵직하고 차분한 성격에다 열심히 하고 성실하니까 일곱 시즌에 여섯 번 우승할 때 운동을 진짜 열심히 해주고 묵묵하게 큰 나무처럼 잘 버텨줘서 후배들이 잘 따라왔기 때문에 굉장히 고마운 선수예요. 성격이 차분하고 열심히 하니 위성우 감독님이 '임영희를 에이스로 써야겠다'고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많이 혼도 나고 닦달도 당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묵묵히 견디고 훈련을 다해주니까, 진짜로 결정적인 것을 할 때 영희가 다 잘해주니까 그만큼 잠재력이 있었던 선수였다는 거죠. 본인도 쉬지 않고 감독님이 열 개를 요구하면 열한 개, 열두 개를 할 정도로 진짜 열심히 해줬기 때문에 그 만큼 잠재력을 폭발시켰다고 생각해요. 5월 중순 훈련을 시작할 때부터 코치 일을 맡은 건데, 처음부터 잘했어요. 눈치도 빠르고 그 동안에 어느 정도의 틀은 본인도 7년 동안 저랑 감독님이 어떻게 해온 것을 봐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서 제가 훨씬 수월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만큼 아주 잘하고 있어요.”


▶주장 박혜진이 본 임영희

“진짜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것 같아요. 생활할 때나 운동할 때나 모든 선수들한테 물어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성실하고 열심히 운동한다’는 거예요. 저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언니가 은퇴하고 나서 제가 주장을 맡고 있는데, 언니가 어떻게 팀을 이끌었을 때 팀이 잘 되었는지 그런 부분은 지금도 많이 생각하면서 하고 있고, 그리고 제가 고참에 속하기 때문에 이제 운동할 때 임하는 자세도 언니의 영향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도 저한테 큰 도움이 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고, 다행히 언니가 코치로 옆에 있다 보니까 제가 모르는 부분이나 힘든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기 때문에 좋아요. 지금도 언니라고 하면서 속으로 ‘아차’ 하고 있는데, 이게 오히려 어린 선수들은 저보다는 좀 빨리 고쳐져서 코치님이라고 하는데 저는 아직도 언니라고 하고 있어서 빨리 고쳐야 할 것 같아요.”



박강자 아시아경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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