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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9] 사보아 저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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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9] 사보아 저택에서 윤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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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사보아(La Villa Savoye). 사보아 저택으로 불리는 이 집은 나그네가 슬렁슬렁 거쳐 가는 곳은 아닙니다. 파리 30㎞ 외곽 포아시(Poissy)에 있기 때문에 일반 여행객은 잘 찾지 않습니다. 누군가 프랑스에 와서 이곳을 찾는다면 그는 필시 건축가이거나 미래의 건축가일 테지요. 건축 디자인을 공부하는 딸아이가 아니었으면 저도 쉽게 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 집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가 사보아 가족을 위해 설계해서 1931년에 완공한 개인 주택입니다. 충격적으로 혁신적인 집이지요. 이 집을 방문하면 예술은 발상부터 독특해야 한다는 걸 체감하게 됩니다. 제일 눈에 띄는 건 필로티(Pilotis). 구조체의 1층 벽을 허물고 기둥이나 철골 지주로 대체하는 것이지요. ‘지면으로부터의 해방’이 모토입니다. 안이면서 바깥이기도 한, 이 특이한 상황이 해방의 핵심 개념이 되는 겁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발상입니다.


필로티가 보편화 된 곳은 오늘날의 한국입니다. 고밀도 지역에 빌라를 지을 때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1층의 상당 부분을 기둥으로 대체하는 겁니다. 백 년 전에 이런 발상을 처음 선 보인 이가 르코르뷔지에입니다. 뭐든지 처음이 힘들지요. 처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해삼을 처음 먹어본 선조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 징그럽게 생긴 바다괴물을 어찌 먹겠습니까.


건물은 단순 소박합니다. 벽면은 온통 흰 색입니다. 멀리서 보면 녹색 잔디밭 위에 앉아 있는 하얀 피아노 같기도 하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요트 같기도 하지요. 서정적입니다. 외관과 내부는 사각형, 삼각형, 원형 도형이 섞여 있어서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입니다. 인간적인 냄새는 나지 않네요. 흰 연미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밀랍 백작 같은 모습. 난생처음 느끼는 ‘서정적인 수학’ 앞에서 묘한 긴장감이 생깁니다.


완사면 경사로와 나선형 계단의 배치. 욕조 외벽의 둥그런 돋음벽. 옆으로 길게 늘인 창문. 여기저기 액자 효과를 내는 창문들도 특징입니다. 풍경을 액자처럼 담는 창문의 콘셉트가 벌써 백 년 전 건축에서 시도되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창문은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의 통로가 아니라 외부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빛의 터널입니다.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관문이지요. 그것이 옆으로 길게 누워 있을 때, 지평선 전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건축의 기능 속에 철학과 미학과 심리학이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39] 사보아 저택에서

옥상정원도 독특한 개념입니다. 널따란 자갈밭 사이로 듬성듬성 창문이 나 있습니다. 자연채광에 의한 조명장치일 테지요. 벽면은 가로로 시원스레 뚫려 있습니다. 대지 위에 내려앉은 집의 가로세로 비례와 비슷합니다. 그 치밀한 수학 앞에 서 있으니 선운사 대웅전 앞 만세루의 불퉁그러진 나무들이 생각납니다. 대들보, 귀기둥, 서까래…. 쓰다 남은 하찮은 목재들인데 하염없이 아름답습니다. 어느 외국 건축가가 찾아와서 거듭거듭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는 한국 건축의 백미! 만세루가 자연의 극치라면, 빌라 사보아는 인위의 극치입니다.


예술을 통틀어 파괴적 혁신의 주인공은 단연 피카소(1881~1973)입니다. 르코르뷔지에도 그걸 잘 알았지요. 그는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이런 편지를 씁니다. “열흘 전 유네스코 빌딩에서 열린 당신 전시회를 보았어요. 당신 작품이 최고입니다. 철근 콘크리트의 시대를 반영한 것처럼 혁명적이에요. 당신의 뒤에 유네스코가 있고 그 뒤에 다른 화가들이 있을 뿐이에요.”


피카소 역시 르코르뷔지에를 존경했습니다. 건축으로 세상을 혁명시킨 그를 경이롭게 바라보았지요. 르코르뷔지에는 아파트 설계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서민을 위해 지은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1952)에 들른 피카소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이 자기 예술보다 훨씬 진보적이란 걸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도시의 주거문화를 혁명적으로 뒤바꾼 구체적 실체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었지요. 모세혈관으로 이어진 중세 골목길에 대동맥 개념이 도입됩니다. 개인 가구의 단세포들은 집단 주거의 다세포로 진화하지요. ‘주거 생명의 대격변’이 새로운 도시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20세기는 전복의 시대. 피카소는 미술의 이름으로,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이름으로 세상을 뒤엎었지요. 작은 재주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큰 재주는 사람을 충격에 빠트립니다. 충격에 빠진 그 순간부터 세상이 바뀌기 시작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뀐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큰 재주는 당대에 손가락질 받거나 비난당하는 공통점이 있지요.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큰 재주임을 발견합니다. 대개의 천재는 인생 뒤편의 태양입니다. 몸이 지고 난 뒤에야 작품이 찬란하게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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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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