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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8]다시 『말테의 수기』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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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8]다시 『말테의 수기』 옆에서 윤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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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내립니다. 어제의 햇볕 가득한 혈관 속 체온, 오늘은 센 강의 강물처럼 떠내려갑니다. 체온은, 여행지의 설레는 마음은, 바람을 타고 붕붕거리며 날아갑니다. 점퍼를 단단히 입고, 그 위에 우의를 입고, 또 그 위에 우산을 쓰고 걷습니다. 거센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집니다. 나그네의 얼굴은 위험하게 펄럭이고 신발에 붙어 있던 그림자도 견디기 힘든 듯 날아갑니다. 강변의 키 큰 나무들이 머리를 풀고 웁니다. 나뭇잎에 비 듣는 소리. 누군가는 저 소리 때문에 몸이 아프겠지요. 혼자 된 누님처럼, 소리 내지 않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숙소에서 에펠탑을 거쳐 노트르담 성당까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걸어가니 2시간가량 걸립니다. 몽마르트 언덕까지 갔다가 성당에 다시 오니 오후 4시가 훌쩍 넘는군요. 성당 지붕 모서리에 비죽이 나온 괴수(怪獸) 조각상 턱 밑으로 빗물이 연신 쏟아져 내립니다. ‘낙수물받이’로 번역하는 ‘가고일(Gargoyles)’입니다. 사악함을 물리치는 조각상은 어디서나 무섭게 생겼군요. 치우천황 못지않게 무시무시하게 생긴 저 괴수. 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리는[以夷制夷] 것처럼, 괴수를 괴수로 제압하는[以獸制獸] 건 인류의 오랜 지혜가 아니겠는지요.


기다랗게 줄서서 종루에 올라가는 사람들. 저는 사람들을 따라가는 대신 괴수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를 올려다봅니다. 괴수의 하염없는 눈물.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파리의 지붕에 올라 앉아 통곡하는 환청을 듣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하는 오이디푸스 왕.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와 자결하는 어머니. 비운의 공주 안티고네. 모두가 슬픔의 합창에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 무엇일까요? 제 마음의 오케스트라가 아닐까요? 세포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색깔과 선율과 냄새와 맛과 감촉과 글자의 추억들이 지금 이 순간 새로워지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요? 제가 추억을 지휘하는 것인지, 추억이 저를 지휘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계가 아니라는 의심이 자꾸 생겨납니다. 추억이 매순간 새로워질 때가 세계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요?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현실’과 ‘가상’의 차이처럼, 비 오는 파리 거리와 ‘내 마음의 오케스트라’는 서로 다른 세계일 테지요. 저는 마음이 진짜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38]다시 『말테의 수기』 옆에서

오늘 빗속의 파리를 걸어 다니는 일은 새로운 발견의 여행입니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는 세계, 추억이 새롭게 살아나는 부활의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오히려 여기서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스물여덟 살 덴마크 청년 말테가 파리에 와서 머물던 1904년 무렵의 낯설고 불안한 분위기. 시인 릴케가 쓴 소설 『말테의 수기』 속 낯선 분위기도 알고 보면 새로운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릴케는 대도시 파리에서 남들이 보지 않는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보았지요. 사람들은 “지금까지 어떤 진실한 것,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하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수많은 발명과 진보에도 불구하고 다만 삶의 표면에만 머물러 있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말테의 수기』는 사물의 뒤편을 꿰뚫어봅니다. 표피 안쪽의 세계,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보려하기 때문에 시인은 종종 샤먼의 족보에 편입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위대한 시인은 숭고한 예술과 안타까운 정신병의 문틈에 곧잘 끼이는 겁니다. 새로운 길을 가려는 이의 운명이지요. 길은 먼저 가는 사람이 만드는 겁니다. 누군가 걸어가야 합니다. 길을 여는 사람. 그 최고 경지에 오른 이가 진정한 행인입니다.


비 오는 파리 거리를 쏘다니며 젊은 날의 릴케의 불안과 섬세한 감수성을 생각합니다. 로댕을 좋아하고, 그의 비서가 되어 그의 집에 기숙하기도 하며, 그의 전기를 집필하고, 그러나 사소한 일로 다투고서 헤어져버린 예민한 청년의 파리 체류 시절을 그려봅니다. 돌아보니 저도 스물한 살 문학청년일 때 비슷한 체험을 했네요. 집 나와 떠돌고, 시월 강변에 앉아 불안하고 격정적인 『두이노의 비가(悲歌)』를 읽으며 시인의 머릿속 비바람을 함께 맞기도 했지요.


비바람 몰아치는 파리 거리를 헤매 다녀보니 젊은 날 읽었던 릴케가 다시 살아납니다. 안 보이는 게 조금씩 보이고, 숨어 있던 소리도 들립니다. 파리. 세계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도시. 온종일 비 내리는 오늘은 사람 대신 다른 생명들이 나타납니다. 구름이 낮게 깔리더니 가까이 다가와 제 살을 만집니다. 천지 사이가 그만큼 가까워졌으니 제게도 무슨 소리가 들릴 테지요. 폭풍우에 몸 걸어 잠근 센 강변의 가판상점들. 제 손을 잡고 가는 구름이 그 문을 가만히 두드리더니 제우스신의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려줍니다. ‘세상에 집 가진 모든 이들이여, 나그네를 박정하게 대하면 벌을 받는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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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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