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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트렁크/임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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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떨어진 잎들을 트렁크에 넣는다 허름한 트렁크를 열고 차곡차곡 잎을 담는다 열어젖힌 트렁크에 바람을 채운다 새들이 트렁크에 앉는다 구름이 트렁크에 들어가 새들과 함께 어떤 하늘이 된다 당신은 트렁크를 들고 바다로 갈 예정이다 트렁크 안에는 자꾸 구름이 흘러다닌다 새들, 납작한 새들이 종잇장 같은 구름에 묻혀 흘러다닌다 당신의 트렁크는 수평선에 버려질 것이다 당신은 수평선까지 이 트렁크를 끌고 가 트렁크 속에 담긴 모든 것을 털어 버릴 계획이다 가슴속에 굽이쳤던 말들을 하나하나 내다버릴 마음이다 마음을 휘저었던 당신의 애인과 말들을 트렁크에 담는다 트렁크는 잠긴다, 옮겨진다, 흔들린다, 흘러간다, 열린다, 뒤집힌다, 가라앉는다 트렁크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후 한 詩]트렁크/임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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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최종적인 전언은 누가 읽더라도 마지막 문장일 것임에 틀림없다. "트렁크는 아무것도 아니다". 맞다. 그렇지만 온통 "마음을 휘저었던" 그 모든 것들이 이 단 한 문장으로 그렇게 쉽게 해소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이 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오히려 마지막 문장 바로 앞까지의 저 길고 굽이진 문장들이 아닐까 싶다. "떨어진 잎들을 트렁크에 넣"고 "수평선까지" "트렁크를 끌고 가 트렁크 속에 담긴 모든 것들을 털어 버릴" 때까지 "가슴속에 굽이쳤던" 그 어쩔 수 없는 마음들 말이다. 문득 오래전에 잊었던 트렁크 하나가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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