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윤재웅의 행인일기 22] 마드리드 거리에서

시계아이콘02분 10초 소요
언어변환 뉴스듣기

[윤재웅의 행인일기 22] 마드리드 거리에서
AD

6주간 여행하는 이는 책 한 권을 쓰고, 6개월 간 여행하는 이는 원고 한두 꼭지, 6년을 여행하는 이는 한 줄도 못쓴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짧은 견문 과장하는 글을 경계하자는 이야기죠. 풍경의 표피가 아닌 안쪽을 들여다보라는 권고처럼 들립니다. 부끄럽지만, 여기 마드리드 안쪽의 세 가지 이야기 조각이 있습니다. 이어 붙이면 쓸 만한 조각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솔 광장 어느 모퉁이 점포. 폭우를 피해 들어갔다가 맛보게 된 1유로짜리 피자. 우리 돈 1,300원쯤 되는, 유럽에서 가장 싼 한 끼의 식사. 시인 함민복이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라고 노래한 마음이 전해 옵니다.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하는 순간, 그대 마음속에도 긍정이 탄생할 테지요. 제목이 ‘긍정적인 밥’입니다.

1,300원은 지하철 기본요금. 이 돈으로 한 끼니 때우면 지하철로 이동하는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배 속에 채우는 게 아닐까요. 옛적에 이태백은 ‘천지 공간은 만물이 잠시 쉬어가는 숙소[夫天地者萬物之逆旅]요, 세월은 오랜 동안 지나가는 나그네[光陰者百代之過客]’라 했는데, 1,300원짜리 나그네의 천지세월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을까요. 하지만 배 속이 든든하면 650원인들 작기만 하겠습니까. 그래도 손바닥보다는 큰 피자 한 조각. 폭우가 깨우쳐 준 ‘긍정적인 끼니’입니다.


둘. 왕궁 앞 길거리의 중년 사내. 행색은 초라해도 눈에서 별빛을 쏟아내는 남자. 철사를 휘어 장신구를 만드는 수제 목걸이 제작자입니다. 철사와 펜치만으로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솜씨. 철사가 꼬불꼬불 구부러지면서 알파벳으로 태어나는 게 재미있습니다. Estelle. ‘별’이란 뜻을 가진 이름. 딸에게 줄 선물을 주문합니다. 철조망이 되기도 하고 용수철이 되기도 하는 저 철사가락의 천변만화. 마드리드에선 여심에 호소하는 목걸이로 다시 태어납니다. 딸아이가 좋아할 리 없을 게 뻔한 싸구려 B급 예술품을 좋아라 받아들고 제작자와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해도 예술가는 변하지 않는 게 있죠. 두 눈에 별을 담고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예술가 아닐까요?

[윤재웅의 행인일기 22] 마드리드 거리에서

예술가는 정치가나 군인과는 다릅니다. 정치와 군이 권력과 목숨을 다툰다면 예술은 자신을 연소시켜 삶을 빛냅니다. 스스로 타오르는 별. 항성과 같은 거죠. 그게 진정한 의미의 ‘스타’입니다. ‘스스로 타오르는 사람’이라고 하면 기억하기 좋겠군요. 사람은 항성형, 행성형, 위성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뭇 별의 중심이 되어 스스로 타오르는 사람. 에너지를 나누어주는 사람. 그가 바로 항성형 인간이요, 예술가요, 성인의 경지에 이른 이입니다. 역사는 반복해서 증언하죠. 정치가가 점령을 결정하면 군인이 쳐들어가 창칼로 수많은 목숨들을 해칩니다. 그들은 남을 태우는 일에 골몰하죠. 그러면 예술가는 그의 상상 속에서 힘센 장수가 되어 은하수 푸른 물을 이 땅에 끌고 와 피 묻은 창과 칼을 씻으며 노래합니다. 피를 씻는 노래. 예술가는 자기의 혼과 온 별들의 혼을 태워 지상의 삶을 정화합니다. 두 눈에 별을 담고 있는 예술가란 그런 뜻이죠. 어찌 가난과 초라함만으로 스타를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셋. 시내 곳곳에 있는 아가씨 인형, 인상적입니다. 단발머리에 부푼 치마 입은 모습. 형태는 비슷한데 색깔과 디자인이 조금씩 다릅니다. 여기 마요르 광장의 아가씨는 기념사진 찍으려는 이들에겐 인기 만점이죠. 몸 전체를 우표로 디자인했으니까요. 소인 찍힌 옛 우표들로 표면을 덮고 코팅을 씌운 작품입니다. 엄지손톱만 한 우표에 가늘고 섬세한 선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습니다. 광장의 오래된 우표 거래 풍속을 기념하기 위한 게 아닐까요?


우표 인형 아가씨. 눈비 맞는 거리의 예술품인데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결합한 창의적인 콘텐츠입니다. 길거리 악사가 옆에서 기타 연주라도 한다면, 금세라도 플라멩코 춤을 출 것 같습니다. 춤추는 우표들. 누구에게든 애타는 소식들. ‘그대 보고 싶군요. 나 아직 살아 있어요….’ 세상의 모든 우표는 이런 심리를 반영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서로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아날로그의 그리운 향기죠.


AD

노동경제학자 송일호 교수. 50년 동안 10만 점 이상의 우표를 수집하는가 하면, 우표 책을 자비로 출판해 지인들에게 나누어주던 그 교수님 생각납니다. 취미생활이 전문가 수준까지 올라가는 애호와 향유의 삶이죠. 우표 아가씨 사진을 찍어 그에게 전송합니다. 이건 디지털인데, 앞의 아날로그와 합치니 이어령 선생이 말한 ‘디지로그’가 저절로 되는군요. 그리운 사람 서로 만나는 새로운 디지로그. 마드리드 거리의 특별한 경험입니다.


문학평론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1606:40
     ⑥ 생존과 직결되는 복지 문제로 챙겨야…"진단체계 만들고 부처 간 연계 필요"
    ⑥ 생존과 직결되는 복지 문제로 챙겨야…"진단체계 만들고 부처 간 연계 필요"

    편집자주'장보기'를 어렵다고 느낀 적 있나요? 필요한 식품은 언제든 온·오프라인으로 살 수 있는 시대에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한민국에는 걸어서 갈 슈퍼도 없고, 배달조차 오지 않아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처럼 음식을 살 수 없는 이곳을 '식품사막'이라 부릅니다. 식품사막은 고령화, 지방소멸, 정보격차 등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장보기라는 일상의 불편함이 어떤

  • 25.12.1606:30
    "케첩은 알아도 토마토는 본 적 없다"는 美…일본은 달걀 아닌 "회·초밥이 왔어요"⑤
    "케첩은 알아도 토마토는 본 적 없다"는 美…일본은 달걀 아닌 "회·초밥이 왔어요"⑤

    편집자주'장보기'를 어렵다고 느낀 적 있나요? 필요한 식품은 언제든 온·오프라인으로 살 수 있는 시대에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한민국에는 걸어서 갈 슈퍼도 없고, 배달조차 오지 않아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처럼 음식을 살 수 없는 이곳을 '식품사막'이라 부릅니다. 식품사막은 고령화, 지방소멸, 정보격차 등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장보기라는 일상의 불편함이 어떤

  • 25.12.1406:30
     ④ 이동식 마트는 적자…지원 조례는 전국 4곳 뿐
    ④ 이동식 마트는 적자…지원 조례는 전국 4곳 뿐

    편집자주'장보기'를 어렵다고 느낀 적 있나요? 필요한 식품은 언제든 온·오프라인으로 살 수 있는 시대에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한민국에는 걸어서 갈 슈퍼도 없고, 배달조차 오지 않아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처럼 음식을 살 수 없는 이곳을 '식품사막'이라 부릅니다. 식품사막은 고령화, 지방소멸, 정보격차 등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장보기라는 일상의 불편함이 어떤

  • 25.12.1306:30
    "창고에 쟁여놔야 마음이 편해요"…목숨 건 장보기 해결하는 이동식 마트 ③
    "창고에 쟁여놔야 마음이 편해요"…목숨 건 장보기 해결하는 이동식 마트 ③

    편집자주'장보기'를 어렵다고 느낀 적 있나요? 필요한 식품은 언제든 온·오프라인으로 살 수 있는 시대에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한민국에는 걸어서 갈 슈퍼도 없고, 배달조차 오지 않아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처럼 음식을 살 수 없는 이곳을 '식품사막'이라 부릅니다. 식품사막은 고령화, 지방소멸, 정보격차 등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장보기라는 일상의 불편함이 어떤

  • 25.12.1206:40
    "새벽배송은 사치, 배달이라도 됐으면"…젊은 사람 떠나자 냉장고가 '텅' 비었다 ②
    "새벽배송은 사치, 배달이라도 됐으면"…젊은 사람 떠나자 냉장고가 '텅' 비었다 ②

    편집자주'장보기'를 어렵다고 느낀 적 있나요? 필요한 식품은 언제든 온·오프라인으로 살 수 있는 시대에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한민국에는 걸어서 갈 슈퍼도 없고, 배달조차 오지 않아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처럼 음식을 살 수 없는 이곳을 '식품사막'이라 부릅니다. 식품사막은 고령화, 지방소멸, 정보격차 등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장보기라는 일상의 불편함이 어떤

  • 25.12.1810:59
    이재명 대통령 업무 스타일은…"똑부" "구축함" "밤잠 없어"
    이재명 대통령 업무 스타일은…"똑부" "구축함" "밤잠 없어"

    정부 부처 업무 보고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국방부 보훈부 방사청 등의 업무 보고가 진행된다. 업무 보고가 생중계되는 것에 대해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감시의 대상이 되겠다는 의미, 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무 보고가 이루어지면서 이재명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대통령실 참모들과 대통령과 같이 일했던 이들이 말하는 '이재명 업무 스타일'은 어떤 것인

  • 25.12.0607:30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이현우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한국인의 장례식이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가운데, 우리 정부도 해당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매체 등에서 우크라이나 측 국제의용군에 참여한 한국인이 존재하고 사망자도 발생했다는 보도가 그간 이어져 왔지만,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확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2.0309:48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조응천 전 국회의원(12월 1일) 소종섭 : 오늘은 조응천 전 국회의원 모시고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솔직 토크 진행하겠습니다. 조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조응천 : 지금 기득권 양당들이 매일매일 벌이는 저 기행들을 보면 무척 힘들어요. 지켜보는 것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